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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주(羅州)라는 남도의 유서 깊은 고을이 있다. 어느 핸가 가보았다. 그 이름처럼 곱고 고즈넉했다. 비단 고을이라니. 그곳은 들녘도 이름난 데라 가을이면 비단 폭을 펼쳐놓은 듯 하였겠구나 생각했었다. 더구나 저녁 노을은 들과 하늘을 붉은 비단결로 하나로 묶는 장관이었는데, 그러한 들로는 물이 모이고 길이 모이고 시선이 모인다. 또 그에 따른 기쁨과 아픔도 모여서 위로를 청하고 즐거움을 나눈다. 정끝별(44) 시인은 그곳이 태생지라 한다. 시인은 하는 수 없이 그 산천을 닮았겠으나 그 '사람'을 알아 갈수록 더더욱 그 이름과 시와 더불어 아주 아주 맞춤이다. 넉넉한 들과 유장한 노을 빛깔에 더한 초롱한 별이라니. 그의 마음의 소출인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누군가의 보살행 없이는 어떤 하찮은 생명도 부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현존하는 '나'라니! 내가 나 아닌 누군가의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시 나는 '나의 전부'로 '무작정' 너의 떨고 있는 '가지 끝'과 '혈혈단신 묻혀 있는 뿌리 끝', 그러니까 너의 전부를 일깨우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사랑하는 일임을 말한다.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되어주는 거룩함!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이 되라는, 즉 생명이 되라는 메시지를 이 시는 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라는 한 줄짜리 한 연을 눈여겨보자.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는 '사랑한다'는, 너무나 흔해진 말의 무의미함을 이 시는 질타하고 있기도 하다.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까마득한 날에〉)하고 '저 무궁' 생명의 원천을 다시 한번 노래할 때 그의 마음 바닥은 나주평야의 그것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은 무궁한 모성적 사랑이고 모든 떠도는 것들의 안식을 감싸주는 사랑이다. 밥을 끓여 구체적인 사랑을 현현하고 마음의 항구로서 방랑을 재운다. 시인은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밀물〉)라며 서로의 상처를 만져주는 사랑법을 노래한다. 그 사랑은 더 깊어진다.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춘수(春瘦)〉)처럼 '길이 더 멀리 보이는', 사랑 너머까지가 보이는 혜안(慧眼)의 사랑이다.
<출처> 2008.10.23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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