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경남 남해, 한려수도 파란 바다를 빛내는 나비 한 마리

by 혜강(惠江) 2008. 8. 25.

경남 남해  

 

한려수도 파란 바다를 빛내는 나비 한 마리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나비다. 지형도를 놓고 가만히 살펴보면 남해군(南海郡)은 한 마리 나비를 닮았다. 하지만 남해도(南海島)만으로는 불완전하다. 동쪽이 허전하다. 서쪽 날개와 동쪽 날개의 이런 불균형은 창선도(昌善島)가 연결됨으로써 완성된다. 그 역할을 지족해협에 놓인 창선교가 맡는다. 이렇게 해서 남해군은 한려수도 파란 바다를 수놓은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로 완벽하게 변신하게 된다. 

 

 

 

▲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지족해협엔 전통 원시 어업의 하나인 죽방렴이 20여개 남아 있다.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자암(自菴) 김구(金銶·1488-1534)는 남해로 유배 왔다가 남해를 ‘한 점 신선이 사는 섬’이란 뜻으로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찬탄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조차 잠시 잊게 만드는 신비로운 섬이 바로 남해도다.

 

 

최근 남해 주민들은 ‘보물섬’이란 말로 남해를 자랑하고 있다. 나라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으로서의 보물은 용문사 괘불탱(보물 제1446호) 단 한 점뿐이지만, ‘보물섬’이라는 말이 과장이라고 핏대 올리는 이는 없지 싶다. 실제로 남해엔 보물급 명소가 많기 때문이다.

 

 

한번 짚어보자. 인간의 원시 어업방식인 죽방렴과 석방렴, 자연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녹색의 부드러운 숲 물건리 방조어부림, 육지의 웬만한 돌산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 미감을 지닌 금산, 편백나무향이 그윽한 숲에 들어선 편백자연휴양림, 파란 바다와 층층의 다랑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가천 다랭이마을, 앵강만 조망이 빼어난 천년고찰 호구산 용문사, 팔만대장경 판각 장소로 알려진 고현 대사리 마을, 그리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바다인 노량해전의 관음포…. 숨 가쁘다. 어찌 이런 곳을 보물섬이라 하지 않겠는가.

 

 

 

▲ 삼천포-창선대교의 야경. 2003년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남해군으로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남해군의 출입구는 전통적으로 서쪽 날개 위쪽인 노량해협이었다. 대동여지도엔 이곳으로 길이 있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남해로 유배 오는 사람들도 모두 여기서 노량나루를 건넜을 것이다. 1973년 준공된 남해대교는 노량나루를 이으면서 남해 출입구 역할을 더욱 견고히 했다. 그러다 2003년 동쪽 날개 위쪽에 창선-삼천포대교가 놓이면서 남해 출입구는 두 군데로 늘어났다.

 

 

남해대교와 창선-삼천포대교. 고민 끝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바다는 남해 여행의 마무리로 장식하기로 하고 창선-삼천포대교로 남해군으로 들어선다. 삼천포항과 창선도 사이에 있는 늑도·초양도·모개도는 한려수도 징검다리다.

 

 

이렇게 들어선 창선도 첫 여정은 가인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시작한다. 우리나라 남해안엔 공룡 발자국 화석이 넘쳐난다. 지금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인데, 이곳 가인리 공룡발자국 화석의 특징은 무엇보다 사람 발자국 모양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사람 발자국과 비슷한 수각류의 발자국’으로 표현하며, 이런 유형은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보고된 적이 없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 삼천포-창선대교를 건너가면서 남해군을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나비 같은 남해군의 섬들이 아련하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구 역사상 공룡과 인간은 동시에 존재한 적이 없다.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공룡과 인간이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래서 이곳의 ‘사람 발자국과 비슷한 수각류의 발자국’은 창조론을 믿는 이들에겐 진화론을 공격하는 데 아주 좋은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어쨌든 가인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보물섬 남해를 미스터리한 섬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창선면 소재지로 되돌아와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면 이내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지족해협(폭 500m, 길이 3km)이 발길을 붙든다. 남해도와 창선도에 감싸 안긴 강진만 일대 조류의 속도는 평균 1.2노트(2.2km), 이 지족해협과 남해대교가 있는 노량해협의 유속은 최대 8노트(15km) 이상이다. 이는 시속이 최고 13노트(24km)에 이르는 진도 명량해협의 유속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제법 알아주는 유속이다.

 


가만히 보면 물살 빠르기로 소문난 이 바다 한가운데 나무가 촘촘히 박혀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전통 고기잡이 시설인 죽방렴(竹防簾)이다. 통나무를 세워놓고 주렴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물살 반대방향으로 벌려놓은 원시 어장. 돌로 만든 것은 석방렴(전라·충청에선 독살)이라 한다. 예전엔 이런 형식을 통틀어 어살(漁箭), 방전(防箭)이라고도 했다. 이런 전통 어장이 디지털 시대에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자세히 그 기능을 살펴보자.

 

 

우선 죽방렴을 만들기 위해선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말뚝)을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갯벌에 V자로 벌려 박고, 모서리에 원통형 ‘발통(불통, 임통)’을 만든다. 그러면 거센 조류를 따라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썰물 때 ‘사도’를 통해 들어선 뒤 발통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어부는 썰물 때 배를 타고 접근해 뜰채로 퍼올리기만 하면 된다.

 

 

 

 

▲ (좌)창선면 가인리 해안에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 사람 발자국과 비슷한 ‘수각류의 발자국’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끈다.(우)벽련마을 앞에서 바라본 노도. 서포 김만중은 이곳에서 유배 당시 ‘사씨남정기’를 지었다고 한다.

 

 

죽방렴 조업은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를 맞춰서 한다. 물살이 셀 때 물고기가 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먹이도 많아 물고기가 잘 잡힌다. 그래서 어부들은 물살이 약한 조금 때보다는 물살이 센 사리 때 바쁘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 때라 해서 손을 놓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작업을 하지 않으면 발통 안에 든 물고기들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부들은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두 차례씩 자기의 죽방렴을 확인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조업을 나설 때 보통 “물 보러 간다”고 말한다. 물때를 제대로 지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보통 물때는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발표한 조석표를 참고하지만, 대부분 스스로 체득한 습관적인 감각으로 물을 보러 나갈 때가 많다고 한다.
죽방렴 작업은 보통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간 이어진다. 겨울엔 수온이 낮아 어획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쉰다. 따라서 겨울철엔 발통의 말목은 그대로 두고 그물과 대발은 철거한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다시 설치하여 늦가을까지 조업하는 것이다.
길손도 몇 해 전 죽방렴을 가업으로 이어온 분의 도움으로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는 전 과정을 취재한 적이 있다. 슬프게도, 이번 남해 여정에서 그 분이 얼마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정성으로 죽방렴의 멸치를 거두고 삶고 손질하던 그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의 명복을 빈다.
대부분의 죽방렴은 부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부두를 떠난 배는 보통 5분 안에 어장에 도착한다. 죽방렴에 도착하면 어부는 배를 말목에 고정시킨 뒤 발통문을 열고 들어가 작업한다. 발통문은 발통 한쪽에 설치한 작업용 출입문인데, 보통 때는 자물쇠로 잠가둔다.
어부는 곧바로 물고기를 퍼올리는 게 아니라 제일 먼저 발통 안에 들어온 쓰레기나 불가사리·해파리 같이 해로운 생물 등을 족대로 건져낸다. 그 다음 말목에 매달아둔 후리그물을 펴서 사목 옆의 말목에 세워서 묶어두고, 나머지 한쪽으로 발통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고기를 모은다. 그 다음 죔줄을 잡아당겨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이어 후리그물 안의 물고기를 족대로 퍼서 둥우리에 담으면 된다. 잡힌 물고기의 양이 적을 때는 전 작업을 혼자 하지만, 많을 때는 2~3명이 분업하는 경우도 있다.

 


▲ 1전통 고기잡이 시설인 죽방렴. 2후리그물로 발통에 걸려든 멸치떼를 모으는 작업. <2005년 촬영> 3둥우리에 멸치를 담는 작업. <2005년 촬영> 4멸치 삶기.소금물의 염도를 맞추는 일은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2005년 촬영>

 

▲ 5멸치 말리기. 너무 말리면 잘 부스러지고, 덜 말리면 보관 과정에서 쉽게 썩는다. 6멸치 선별 작업. 7완성된 죽방렴 멸치. 건멸치의 꽃이라 불린다.

 

 

죽방렴은 멸치를 잡는 어법이어서 이 멸치를 노리는 갈치·학꽁치·붕장어·도다리·농어·감성돔·숭어·보리새우 등 다양한 종류가 들어온다. 이중 멸치가 80% 정도 차지한다. 수십 년 전엔 조기·대구·광어도 많이 잡혔다고 한다. 부두에 도착하면 온가족이 모여 물고기 선별작업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횟감으로 인기 좋은 우럭도, 광어도 모두 ‘잡어’일 따름이다.

 

 

이렇게 선별한 멸치는 크기별로 나눠 소금물에 삶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금물의 염도를 맞추는 일이다. 봄·가을처럼 멸치가 크거나 기름진 경우는 여름 멸치보다 더 많은 소금물을 사용하여야 한다. 소금의 품질과 농도, 이것이 바로 어장주들이 ‘전가의 보도’로 삼는 비법이다. 

 

 

가마솥에 멸치를 삶은 뒤 산대미라 부르는 고기 건조발을 가지고 멸치를 떠서 부둣가 건조장에 말린다. 건조작업 역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너무 말리면 잘 부스러져 상품가치가 떨어지고, 덜 말리면 보관과정에서 쉽게 썩기 때문이다. 멸치는 삶은 뒤 바로 자연 햇살에 말리는 게 최고다. 그러면 하루만에 건멸치의 꽃이라는 죽방렴 멸치가 탄생하는 것이다.

 

 

▲ 죽방렴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지족해협의 일몰. 창선교에서 바라보았다.

 

 

연중 잡히는 멸치의 종류도 다르다.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 사이의 봄철엔 주로 액젖을 만드는 데 이용되는 큰 멸치가 많이 잡힌다. 이후 5월 초엔 가장 작은 치어인 소멸(시레기), 보름 정도 지나면 3~4cm 정도의 베젱이, 6월부터는 7~8cm의 중멸(중사리)이 많다. 윤택 있고, 맛이 좋은 중멸은 멸치의 왕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멸치는 유자망으로 많이 잡는다. 하지만 그물로 잡는 과정에서 멸치의 비늘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신선도나 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죽방멸치는 어장에서 뜰채로 살짝 떠서 싱싱한 상태로 곧바로 가공하기 때문에 상처가 하나도 없고, 맛이 뛰어나다. 

 

 

죽방멸치는 생김새가 납작하고, 은백색의 빛깔과 금색을 띠고 있어 여느 멸치와는 구분된다. 이렇듯 비늘 하나 상하지 않고 곱게 건져 올린 죽방렴 멸치는 물살이 빠른 곳에서 잡힌 것들이라 기름기가 적고 쫄깃하며 비린내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 당연히 일반 멸치보다 몇 곱절이나 비싼 값에 팔린다. 죽방멸치는 대부분 서울의 유명 백화점으로 올라간다. 

 

 

최근의 가격은 2㎏짜리 특등품 한 상자에 소비자가격이 50만 원을 호가한다. 물론 중품은 10만 원 내외, 하품은 2만 원대까지 떨어지지만, 이것도 주머니 가벼운 서민에겐 싼 가격이 아니다. 멸치 잡는 방식은 전통적이라 소중하고 정겹지만, 거기서 생산된 상품은 언감생심이니 이런 역설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죽방렴은 해양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의 말대로 ‘남해안이 살아있다는 마지막 자존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죽방렴의 어획량은 나날이 줄고 있다. 주민들은 해안 간척, 강진만의 정치망, 그리고 화력발전소·제철소 등으로 인해 수질오염과 수온이 상승해 어자원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 최근 대형 다리가 많이 생기면서 교각이 조류의 흐름을 바꿔놓은 까닭도 있다. 

 

 

그래도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이 디지털 시대에도 원시어업 죽방렴은 아직 건재하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가가치를 가지고 남해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데도 큰 역할도 하고 있으니 남해를 빛내는 소중한 보물임이 틀림없다. 요즘도 싱싱한 멸치와 갈치들이 뿜어대는 날카로운 은빛은 죽방렴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 저녁 무렵 붉은 빗살을 긋는 죽방렴 일몰 풍광은 덤이다.

 

 

지족해협에서 잡은 죽방렴 멸치회와 갈치회로 입맛을 돋우면 이젠 본격 남해도(南海島) 여행이다. 남해군의 맏형이요, 기둥인 남해도는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남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얻었다. 한반도 남쪽 바다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섬들이 있는데, 선조들은 하필이면 이 섬에 남해라는 이름을 붙여줬을까. 아마도 위치로 봤을 때 부산과 해남을 잇는 남해안의 한가운데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물건리 해안의 방풍림. 원래 이름은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고기떼를 부르는 숲’이라는 뜻의 방조어부림이다.

 

 

3번 국도를 타고 시계바늘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남해도 여행의 가장 기본적인 동선이다. 남해도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절경은 남해군의 ‘녹색 보물’인 물건리 방풍림. 350여 년 전 심은 팽나무·상수리나무·수리나무·이팝나무·후박나무·때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룬 곳이다. 

 

활시위처럼 굽은 해변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이 숲은 거센 해풍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면서 고기떼를 유인하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녹색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는 물고기들이 해안의 나무그늘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리 방풍림의 원래 이름은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고기떼를 부르는 숲’이라는 뜻의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이다. 남해군은 어디를 가나 방풍림이 잘 조성되어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방조어부림이 가장 돋보인다. 그래서 길손은 남해 여행 중 야영할 때 편백 자연휴양림에서 자리를 못 구하면 이곳을 이용하는 편이다.

 

 

▲ (위)남해바다 조망이 빼어난 금산의 상사바위.(아래왼쪽)남해의 꽃이요, 보물섬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남해 금산. (아래오른쪽)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에 들렀던 서불이 남긴 글자라는 전설이 서려있는 석각문.

 

 

남해도의 최고봉인 금산(701m)은 보물섬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섬엔 산이 많지만, 남해처럼 바위와 숲이 조화를 이뤄 자태가 빼어나고, 해안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를 곳곳에 지니고 있는 산은 흔치 않다. 그래서 금산은 일점선도 남해의 꽃이요, 보물섬을 대표하는 보물이다. 

 

 

이곳에 깃든 사연도 많다. 아주 오랜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보낸 서불(徐市, 徐福)은 이곳에서 불로초를 구하려 했고, 신라의 원효는 도를 깨달으려 보리암을 지었다. 또 고려 말기엔 이성계가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산신께 제사를 올려 소원성취도 했다. 

 

 

이렇듯 신비로운 사연들이 전하는 금산. 38경으로 대표되는 금산의 기암절벽과 역사 유적들은 제비 같은 사투리로 감탄사를 던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쌍홍문 협곡지대를 빠져나가면 금산에서 조망이 가장 빼어난 상사암이다. 돌아보면 가파른 절벽 위엔 보리암이 아슬아슬 앉아있고, 그 너머로는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히 절경이다.

 

 

▲ 원효가 창건했다는 보리암. 양양의 낙산사 홍련암,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금산에서 잠시 중국의 역사를 들춰보면,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은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당연히 죽

지 않고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진시황은 동방의 삼신산에 불초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방사(方士)인 서불에게 동남동녀 3천 명을 주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하였다. 

 

 

동방은 우리나라를 말한다. 또 중국 전설의 삼신산인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은 우리의 명산인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하여튼 서불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산둥반도 해안선을 따라 랴오둥반도로 건너간 뒤 한반도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불로초를 찾아다녔다.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 거제도, 통영 소매물도, 남해도 서리곶, 고흥 팔영산 등엔 서불이 다녀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중에서도 남해 금산엔 그 흔적이 가장 생생하다.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扶蘇)가 귀양을 살았다는 부소암이 금산에 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선 찾기 어려운 증거가 남아있다. 그건 바로 금산 남서쪽을 흐르는 두모골 거북바위 옆에 있는 석각문이다. 가로 7m, 세로 4m 되는 반석 위에 기이한 모양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 문자가 서불이 남해 금산을 다녀가면서 남긴 증표라 한다. 이 문자의 정식 명칭은 남해 상주리 석각(도기념물 제6호)인데, 흔히 서불과 관련지어서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 등이라고도 부른다.

 

 

▲ (좌)앵강만 조망이 좋은 호구산 용문사.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은 승군으로 참여하여 일본군과 싸웠다.(우)용문사 구유.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밥을 담았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이 문자는 아직 해독이 안 되고 있다. 보통 진시황 이전의 고문자(古文字)로 추측한다. 또 한국 고대문자이거나 고대 거란족 문자, 혹은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도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는 등, 선계로 가는 입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얼마 전엔 중국 전문가가 이 문자를 중국 글자인 주문으로 된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이라는 6개의 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는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는 뜻이다. 

 

 

서불 연구자들이 사기,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불과 관련된 기록을 정리한 기록을 보면, 진시황은 서불을 파견하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내어 바다에 들어가 선약을 찾도록 하였다. 서불 일행이 택한 행선지는 발해만 건너의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의 삼신산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하지 못한 서불 일행은 두려워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나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평원광택(平原廣澤)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그곳이 어디인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한중일 삼국의 의견이 분분하다.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만드는 석각문의 힘은 대단하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남해가 보물섬이 되는 게 아닌가. 

 

 

금산을 벗어나면 이젠 길은 남해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앵강만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이어진다. 물건리에서 미조면까지 이어지는 물미해안도로는 해안을 굽이돌 때마다 한려수도의 절경이 연이어 펼쳐져 좋고, 앵강만 해안도로는 부드러운 바다 곡선이 포근하게 다가와서 맘에 든다. 뿐만 아니라 서포 김만중이 유배왔던 노도를 비롯해 신전·두곡·월포 같은 아기자기한 해안, 석방렴을 관광자원화한 홍현 해라우지 마을, 그리고 다랑논이 돋보이는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이어지는 앵강만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경관과 사람이 빚은 사연이 적절히 섞여있는 보물 같은 길이다.

 

▲ (좌)석방렴 체험을 하고 있는 관광객들. 싱싱한 자연산 광어, 우럭 등을 잡을 수 있다. (우)홍현 해라우지마을의 석방렴 너머로 앵강만 포근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렇지만 예전엔 머나먼 남쪽 바다 건너 남해도는 때를 잘못 만난 정치인들의 유배지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30여 명이 남해군으로 유배 왔다고 한다. 조선의 문장가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앵강만 동쪽 입구에 떠있는 작은 섬 노도. 이 섬은 서포의 유배지다.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두류산 봉래산 한라산이 가까이 잇닿아 있구나

    삼촌과 조카, 아우와 형이 두루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은 나를 보고 신선이라 하겠구나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1689년(숙종 15) 이곳으로 유배 온 서포가 당시 조카들도 거제·제주·진도 등지로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다. 남들이 자신을 신선으로 부를 거라는 서포의 시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서포는 이곳에서 보낸 말년의 3년 동안 국문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을 지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구운몽’은 양소유가 여덟 명의 여인과 인연을 맺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모두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인생관이 주제인데, 한국 고대소설 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사씨남정기’는 현숙한 처 사씨와 간악한 첩 교씨의 대립을 통해 처첩의 갈등이 드러난 작품.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인 숙종의 마음을 바로잡아 보려고 지은 것이다. 또 서포는 이곳에서 어머니 윤씨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정경부인 윤씨 행장’을 쓴 뒤 1692년(숙종 18) 5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 가천 다랭이마을. 바다로 뻗은 비탈에 층층으로 이루어진 다랑논이 정겹다.

 

 

 현재 노도엔 서포가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 그리고 서포가 세상을 떠난 후 1개월 정도 묻혀있던 곳에 조성한 허묘가 있다. 남해군에선 폐교된 노도분교에 서포문학관을 건립하고 서포공원, 역사테마거리 등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2010년까지 노도를 ‘문학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을 모양인데, 학계에선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우선 아직 서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유배지가 어디인지 확실치 않다고 지적한다. 노도가 아니라 남해의 다른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노도에서 ‘구운몽’을 집필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얼마 전 발견된 ‘서포연보’에 따르면 평안북도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직은 노도에서 3년 유배생활을 했고, ‘사씨남정기’를 짓고 결국 이곳서 생을 마쳤다는 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노도를 보며 서포의 문학정신을 짚고, 남면 홍현리에서 석방렴 체험으로 광어와 우럭을 잡는 관광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뒤 앵강만을 벗어날 때쯤이면 해안선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다랑논(계단식논)으로 유명한 가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마을은 경사가 45도나 되는 산비탈에 남향으로 터를 잡고 있다.

 

 

다랑논은 파도 몰아치는 해변에서 설흘산 중턱까지 척박한 경사면에 모두 120계단. 여기에 500여 개의 논밭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전체가 한 마지기가 넘는 큰배미, 삿갓으로 덮어도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작다는 ‘삿갓배미’, 장구처럼 생겨서 장구배미, 따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외배미, 돌이 논 한가운데 박혀있는 돌팍배미…. 크든 작든 논에도 모두 이름을 붙여주던 우리 조상들의 정겨움에 싱긋 웃음이 나온다. 
 

 

▲ (좌)남해 가천마을의 암수바위. 매년 처음 잡는 고기를 바위에 걸어 놓으면 풍어가 든다고 한다.(우)노량해전의 현장을 조망할 수 있는 첨망대.

 

 

물론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수식이 붙은 필리핀 바나우에의 계단식 논이나, ‘천년의 기적’이라는 중국 윈난성 하니족의 계단식 논에 비하면 가천리 다랑논의 규모는 매우 작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계단식 논이라면 빠지지 않는 농경민족이 아닌가. 예전엔 전국 각지에 다랑논이 많았으나 산업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묵으면서 버려지거나, 아니면 현대식 건물이 어지럽게 들어서는 바람에 풍광이 거의 훼손되었다.

 

 

 그나마 돌아다니다 보니 지리산 남쪽의 문수계곡과 그 주변, 산청 황매산 남서쪽의 법평 마을, 상주 갑장산 동쪽의 승곡·비룡 마을에 다랑논의 운치가 제법 남아 있는데, 이런 곳의 다랑논도 잘만 가꾸면 명승으로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곳들도 하루가 다르게 휴경지가 되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다랑논 보존방법을 찾아봐야할 것이다.

 

 

 

▲ (좌)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먼저 도착한 관음포 육지에 세운 이락사(李落祠). 이순신 장군이 꽃처럼 숨진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바다인 노량해협에 걸려 있는 남해대교와 거북선.

 

 

남해도 여행의 마무리는 노량해협이다.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무패로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면서 겨레의 신화가 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장군의 마지막 바다는 바로 노량 앞바다다. 장군은 마지막 전투를 앞둔 1598년(선조 31) 11월18일 자정 무렵 노량 관음포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그리고 19일 새벽 2시경, 조명연합함대 150척과 일본 500척이 접전을 벌인다. 4시경 고비를 넘기는 최대 혈전이 벌어졌고, 해가 뜬 9시경 적의 유탄을 왼쪽 가슴에 맞게 된다. 그리고 1시간 뒤인 10시경 장군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장군이 남긴 이 마지막 말은 장군의 유해가 맨 처음 닿은 곳에 세운 이락사(李落祠) 입구의 자연석에 ‘戰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라는 한자로 새겨져 있다. 남해군에선 최근 전문가에게 의뢰해 장군이 생을 마친 정확한 지점을 찾았는데, 당시 전투 상황과 조수, 지형지물, 충무공의 전략전술, 우리나라와 중국 및 일본의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현지 조사를 거친 결과, 관음포 해안 이내기 끝과 어서리 끝 사이의 바다라고 결론지었다. 즉 장군은 관음포 입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것이다.

 

 

▲ (좌)충렬사 뒤쪽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허묘. 장군의 유해는 이곳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다가 20일 뒤에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우)이락사 입구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戰方急 愼勿言我死(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글귀를 새긴 돌이 세워져 있다.

 

 

 

장군의 유해는 관음포 해안에 내린 뒤 지금의 충렬사(忠烈祠) 자리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그리고 20일 뒤인 12월10일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1632년(인조 10) 이곳 유림들은 장군이 묻혀있던 옛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충렬사의 시초다. 사당 뒤쪽엔 장군의 허묘가 남아있다.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500척 중 50척만 살아남았다. 해전에선 배가 침몰하면 거의 죽는다. 따라서 일본 수군의 사망자 수를 정확히 헤아리긴 어렵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명나라 등자룡 장군이 탄 함평전선 한 척만 잃었다. 조선왕조실록, 이덕형 장계 등에 따르면 당시 전사자는 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장수급 10여 명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해전사에 밝은 이들은 다른 기록까지 들춰 확실히 이름까지 나타난 전사자는 총 39명 정도로 보고 있다. 노비로 참전해 이름이 남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해도 최대 100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이 전사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까닭은 무엇일까. 자살설·은둔설 등 많은 추측이 난무하지만, 드러난 사실은 단 하나. 임진년부터 항상 그랬듯이 선두에서 싸우다가 집중 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천해전에서도 총상을 입었던 게 아닌가. 

 

 

참고로 해전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기록을 들춰보면, 임진왜란 초기 해전인 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 통틀어 조선 수군 전사자가 11명,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합해 조선수군 전사자는 19명, 부산포해전은 5명, 이렇게 해서 임진년 해전 전사자 총 30여 명. 정유재란 당시 12척으로 10배가 넘는 대규모 일본 수군과 싸운 명량해전 전사자는 단 2명이었다. 몇 만 명이 죽었는지 통계도 안 잡히는 일본 수군에 비하며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끝까지 침략자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장군의 우국충정. 그러나 300여 년 뒤 조선은 결국 일본에게 먹히고 만다. 35년간의 치욕을 겪은 뒤 광복을 찾고 다시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 등 침탈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박경리 선생의 유고인 ‘일본산고(日本散考)’에 나타난 표현된 대로 정말 ‘고래 심줄 같은 몰염치’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남해를 떠날 시간. 남해대교를 건넌다. 장군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이곳의 저녁노을은 매우 붉다. 오래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보았던 그 붉은 노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 하늘은 흐리다. 진하게 밀려오는 아쉬움. 남해대교 아래로 펼쳐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바다는 참 고요하다.

        

 

 

<출처> 2008. 8 / 월간산 466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