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는 대체로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져 산악관광지가 많다. 북쪽의 감악산, 동쪽의 칠봉산, 남쪽의 앵무봉 등이 솟아 있어 등산 애호가들이 산행을 즐기는가 하면, 산간 계곡이 수려하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한 편이어서 유원지가 많이 발달하여 가족 단위 나들이에 적합하다. 또, 고려 시대 전국사찰의 총 본산이었던 회암사지가 회천면 화암리에 있고, 조선 시대에는 양주관아지·양주향교 등의 역사유적지가 있다. 그런가 하며, 장흥유원지 곳곳에는 예술과 젊음의 향기가 넘쳐난다.
양주 관아지
주소 :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15(유양동 141-1), 문의 : 031-845-3134
양주관아지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아지이다. 1999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양주의 읍치는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1394년(조선 태조 3년) 조선의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진구 일대인 대동촌으로 옮겼다가 다시 견주의 옛터인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으로 옮긴 후, 1506년(중종 1년) 지금의 유양리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복원한 관아가 위치한 유양리는 목사의 정청이었던 매학당이 있던 곳이다. 매학당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외동헌과 가족이 생활하던 내동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여 칸 규모였다. 관아터 중앙에는 옛 동헌을 복원하여 신축하였는데, 동헌은 한식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다. 계단을 올라 화강석 기단 위에 주초를 두고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 두공은 간결한 모양을 두 겹으로 얹은 건물이다.
동헌의 오른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놓았다. 비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이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또, 당시 양주를 다스리던 목민관이 살기 좋은 치세를 구상하던 장소인 금화정과 기당폭포(유양폭포), 그리고 1792년 정조대왕이 양주에 3일간 머물며 백성을 살피고, 사대에서 활을 쏜 것을 기념하는 어사대비가 남아 있다.
양주향교
주소 : 양주시 부흥로1423번길 50 (유양동 266), 문의 : 031-840-4148
양주향교는 1401년(태종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6·25 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9년에 유림들의 주선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만 복원하였고 1984년에 명륜당을 복원하였으나 교육 기능의 약화로 동재·서재는 복원치 못하였다.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 내삼문 안쪽에 대성전과 동무 · 서무가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향교 앞에는 45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약 200m 앞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 받아 교관이 정원 5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선비체험, 다도체험, 활쏘기 등이 있다.
회암사지
주소 : 양주시 회암동 산 14-3
회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증국사탑비나 『동국여지승람』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있는 점을 볼 때 12세기에는 창건되었을 것이다. 회암사가 현재의 회암사지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된 것은 고려 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으므로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 제자인 나옹(懶翁, 1320∼1376)이 그러한 뜻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를 이루면서이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의 왕실 인물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하여 전국 제일의 수선 도량이 되었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가 정현조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고 유신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그 후 1821년(순조 21) 지공 · 나옹 · 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 · 나옹 · 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64년에 사적 128호로 지정된 회암사지는 1997년부터 12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권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
주소 : 양주시 회암사길 281 (회암동 4), 전화 : 031-866-0355
회암사지에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본래 회암사는 1328년(충숙왕15)에 인도에서 원(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이 인도의 아라난타사를 본떠서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으나 문정왕후 사거 후 명종 20년(1565)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그후 폐사되었던 것을 1821년(순조21)에 지공 · 나옹 · 무학 등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 관음전, 조사전, 삼성각, 범종각 등의 전각이 있으며 조사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과 불상 좌우로 지공, 나옹, 무학의 세 승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로 무학대사의 부도인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지공선사부도 · 나옹선사부도 · 무학대사비 등이 있다.
회암사지박물관
주소 : 양주시 회암사길 11(율정동 299-1), 문의 : 031-8082-4170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다음 세대에 교육하고자 건립한 역사유물 박물관이다.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물 총면적 3,562㎡, 부지면적 9,126㎡의 규모이며, 주요 전시시설로는 1층의 상설전시실 1과 2층의 상설전시실 2, 기획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실 1은 회암사와 관련한 출토 유물과 기록, 모형 및 영상을 통해 회암사의 역사와 왕실과의 관계, 대가람의 위상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회암사 대가람 공간에서는 회암사의 규모와 가치를 보여주는 회암사 대가람 복원모형을 전시하고 영상을 상영하여 각 건물의 역할 및 생활상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상설전시실 2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회암사의 불교 문화와 생활, 건축문화를 살펴보면서 억불정책으로 사라진 회암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회암사지와 관련된 왕실, 불교문화 또는 지역문화 전시가 연 1~2회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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