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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에서 만나는 '문경새재아리랑'

by 혜강(惠江) 2022. 4. 1.

 

문경새재에서 만나는  '문경새재아리랑'

 

-  민족의 동질성을 지탱하는 한민족(韓民族)의 노래 -

 

 

글·사진 남상학

 

 

 

   “문경아 새자야 물박달남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질로 놀아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새재아리랑」 1~2절

  우리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은 누가 언제 어디서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리랑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여음인 '아리랑'의 어원에서 그 바탕을 찾고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저 민중들에 의하여 오래전부터 구음(口音)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1896년에 기록된 미국 선교사 H.B 헐버트가 채록한 「아리랑」 악보가 발견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은 근대 이전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본래 아리랑은 농부·어부·광부들이 각기 그들 생활 속의 애환을 아리랑에 담았다는 점에서 집단 노동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업공동체·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한 차원을 넘어서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민중의 노래로 발전하면서 민족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민족의 한(恨)의 정서와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아리랑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끊임없이 전승, 창작, 개사 되어 당대의 정서를 반영해왔다. 그 가운데 한국의 3대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꼽히는 것은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며, 그 외에도 「문경새재아리랑」, 「춘천아리랑」, 「본조아리랑」, 「광복군아리랑」, 「치르치크 아리랑」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경새재아리랑

 문경새재는 아리랑에 대한 기록과 기념물이 많다. 아마도 문경새재아리랑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문경은 조선 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疏通路)였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에 있는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있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가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김만중(1637~1691)의 「새재(鳥嶺)」 시비

 

  어찌 되었든,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이었다.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라는 의미도 과거 길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가 왕래하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했다. 『택리지(擇里志)』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다.

  문경새재를 넘는 사람에게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고개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과 희망에 부풀었던 고개일 수 있어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탄식의 아리랑 고개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다.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기에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문경새재아리랑에는 고갯마루 돌무지에 걸터앉은 나그네의 지친 한숨 소리가 서려 있고, 그 구슬픈 노래는 산허리를 굽이돌아 입에서 입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다.

 “문경아 새자야 물박달남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질로 놀아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아 새재고개는 윈 고갠지/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아 새자야 *시무푸리남근/ 도루깨 노리로 다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아 새자야 *찹싸리남근/ 꼬깜아 꼬지로 다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아 새자야 *뿌억싸리/ 북어야 꼬지로 다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     - 「문경새재아리랑」의 1~6절

 

 

  문경세재아리랑은 71절까지 끝없이 이어지는데, 후렴구인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라는 구절은 전국의 수많은 아리랑의 후렴구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영남권 지역 30개 군 중 14개 군에서 17번에 걸쳐 문경아리랑류가 불렸다. 예를 들어, 새재에서 먼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있는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첫 대목으로 '문경새재'가 등장한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구부야갸 눈물이로구나/ 고개다 집을 짓고 우리님 오시기만 기다린 다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 「진도아리랑」

  문경시는 문경새재 들머리에 옛길박물관을 세우고 아리랑의 성지를 자처하며 각종 아리랑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것은 문경에 ‘문경새재아리랑’이 전래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깊기 때문일 것이다.

 

 

옛길박물관 내의 아리랑 전시물

 

▲옛길박물관

 

  문경 지역의 민속자료와 향토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옛길’이라는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높이는 옛길박물관에는 아리랑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 아리랑의 역사, 문경새재아리랑, 아름다운 한글서예아리랑, 아리랑 음반, 아리랑과 우리의 삶 등으로 나누어 아리랑에 대한 자료들을 보여준다.

  아리랑은 누가 언제 어디서 부르기 시작했을까? 구비(口碑)로 전승되어 온 아리랑은 민중들의 노래이며, 한때 왕도 즐겼던 노래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표상이며, 우리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려진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희망과 절망이라는 역사의 반복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삶과 늘 함께하고 가까이 존재하였던 역사적 실재(實在)이면서 역사적 명목(名目)이었음을 설명한다.

  또한, 문경새재아리랑에 대한 설명도 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고, 봇짐과 등짐을 지고 물건을 팔러 가고, 선비가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들이 새재를 넘었다. 일본군도 문경새재를 넘고, 나라를 빼앗긴 울분도 문경새재를 넘고,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이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재를 넘었다. 그곳에 문경새재아리랑이 있다. 문경새재의 역사와 늘 함께 문경새재아리랑이 있었다.

 

 

아름다운 한글서예 아리랑과 아리랑 음반

 

  사단법인 한국서학회는 아리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여 2013년 10월 19일에서 31일까지 문화체육관광부와 문경시의 후원으로 ‘아름다운 한글서예 아리랑전’을 열었다.

  한국서학회는 전시회가 끝난 뒤 84점의 서예작품을 문경시에 기증하였다. 구전되는 아리랑이 한글서예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영구히 보존되는 역사적 작업이었다.

  또한, 문경시는 한국서학회와 함께 아리랑 가사 일만수(一萬數)를 문경 전통 한지에 기록함으로써 아리랑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드높였다.

  옛길박물관은 ‘아름다운 한글서예 아리랑’ 작품과 아리랑이 수록된 SP 음반, EP 음반, LP 음반, 카세트테이프, CD 음반, 유성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의 아리랑 악보비

  옛길박물관 앞 정원에는 1896년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1863~1949)가 1896년에 채록한 아리랑 악보비가 서 있다. 헐버트는 『The Korean Repository』에 「Korean vocal music」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마지막 단원에서 아리랑을 다루었다. 여기에 수록된 아리랑 악보는 최초의 서양식 채보 아리랑이다.

  그는 악보와 함께 “약 7823절의 사설이 전해진다.”라고 소개하며 후렴과 함께 사설을 실었다. 아울러 “이상과 같이 사설을 영어로 옮겨보니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든다. 한국적인 맛과 멋이 없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 사설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알 수 있는 …… 인간의 본성은 같다는 것, 비록 외모가 다르지만 같은 감정을 갖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며,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문경새재아리랑을 소개했다.

  헐버트가 서양 악보로 채록했던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 중건과 맞물려 근대에 가장 많이 불렀던 아리랑이 바로 문경새재아리랑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평소 아리랑 관련 사업을 역점시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윤환 문경시장이 지었으며, 글씨는 아리랑가사 만수쓰기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서학회 이곤 명예회장이 한글로 썼다.

 

 

문경에 아리랑 비림(碑林) 조성

  문경시는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 지금까지 전국에서 불린 ‘아리랑 노랫말’을 새긴 비석 숲인 ‘아리랑 비림(碑林)’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문경새재 아리랑비 주변에 우리나라 대표 아리랑인 정선, 진도, 밀양, 본조, 문경새재아리랑의 노랫말을 비석으로 설치, 아리랑 비림의 출발이 되게 했다.

  비문은 문경 출신 서예인 심경 황규욱, 농곡 조용철, 소사 채순홍, 경암 김호식, 청운 김영배 작가가 아리랑 노랫말을 썼다. 비림(碑林)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산시성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1,095기(基)의 석비(石碑)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는 별도로 아리랑 가사가 담긴 문경새재아리랑비는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왼쪽 길가에 또 하나가 세워져 있어서 새재를 넘는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감상할 수 있다.

 

 

아리랑과 우리 삶

  우리 민족은 고개를 넘듯이 무수히 삶의 고개를 넘어왔다. 그것은 때로 희망의 고개요, 또 때로는 절망의 고개였다. 작은 고민으로부터 큰 선택의 순간까지 오르고 넘고 내려가는 고개의 개념은 우리의 인식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리랑은 우리가 의식하든 아니하든 상관없이 어쩌면 항상 우리 옆에서 함께 하였던 삶과 역사의 연속적 흐름이라 하겠다. 아리랑은 노래이자 굴곡의 삶 그 자체이며 문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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