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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고즈넉한 가을 여행 '아산' : 세속풍파 견딘 고택(古宅), '비밀의 문' 열다

by 혜강(惠江) 2018. 10. 3.

 

 

고즈넉한 가을 여행 '아산'

 

세속풍파 견딘 고택(古宅), '비밀의 문' 열다

 

 

아산 = 글·사진 박경일 기자

 

 

 

 

 

▲충남 아산 외암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조경과 건축미를 지녔다고 알려진 건재고택의 사랑채와 정원의 소나무. 후손의 빚과 금융기관의 불법대출 등의 사건에 휘말린 고택은 지금 예금보험공사 소유다. 건재고택은 그동안 문을 열어준 적이 거의 없는데, 경매를 앞두고 예금보험공사가 고택을 공개하고 있다.

 

# 외암마을에는 건재고택이 있다

 
충남 아산에는 외암마을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 제주 성읍마을처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외암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예안이씨 집성촌인 외암마을은 관광객들에게도 익히 알려졌지만, 마을 중심에 있는 ‘건재고택’은 대부분 모른다. 건재고택. 기억해두자. 외암마을을 갔다면, 아니 아산을 찾았다면 여기만큼은 꼭 가봐야 한다.

 건재고택은 외암마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졌다. 그럼에도 아는 이들이 드문 건 건재고택의 솟을대문이 그동안 꼭꼭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고택이 최근에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늘 활짝 열어놓은 건 아니고, ‘청하는 이들만’ 안으로 들이고 있다. ‘아는 이들’에게만 보여주겠다는 집주인의 뜻이다.

 건재고택의 주인은 문중의 후손이 아니라 뜻밖에도 ‘예금보험공사’다. 짐작하듯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다. 고택을 지키던 후손이 정원의 소나무 가격만 수억 원이 넘는다는 이 집을 담보로 70억 원을 빌렸다 갚지 못해 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 게 사연의 시작이다. 후손은 빚으로 집을 날린 뒤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건재고택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이는 훗날 불법대출로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5000억 원의 불법대출과 400여억 원의 횡령 등의 혐의로 8년형을 받고 복역 중인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서울대 법대생 사칭사건을 비롯한 사기 행각으로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김 회장은 외암마을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았던 김 회장의 아버지는 한때 이곳 외암마을에서 도지를 받아 생활했었다. 그런 외암마을에서 김 회장이 가장 큰 집인 건재고택을 손에 넣었으니 ‘머슴의 아들이 아버지가 일하던 대갓집을 사들인 셈’이었다. 건재고택을 손에 넣은 김 회장은 고택을 개인별장으로 꾸며놓고는 지인을 초대해 연일 술판을 벌였다. 추사 김정희의 외가이자, 조선 숙종 때 문신 이간의 생가인 유서깊은 고택이 흥청망청 여흥을 즐기는 술자리 파티장이 되고 만 것이다.

 김 회장과 복잡하게 얽힌 채권 채무관계로 건재고택은 미래저축은행에 넘어갔고, 저축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고택은 경매에 부쳐졌다. 몇 번의 유찰 끝에 고택의 소유권은 주채권자인 예금보험공사로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문화재청이 긴급 인수예산까지 편성해 건재고택 입찰에 참여했으나 경매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으로 경매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건재고택의 외부 공개를 결정한 것은 예금보험공사다. 앞으로 다시 이뤄질 경매에서 제값을 받으려면 집의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매매를 위해 문을 연 것이니, 고택 공개는 한시적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지금이 건재고택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누군가 개인이 고택을 낙찰받는다면 언제 다시 문이 열릴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 건재고택은 얼마짜리 집일까

 역사가 깃들어 있는 데다 빼어난 건축과 조경을 갖춘 오래된 고택의 가치를 어찌 평당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래도 궁금하다. 건재고택은 과연 얼마짜리일까. 경매가격으로 가늠해보자.

 고택의 대지는 5714㎡(약 1728평)이고 건축 면적은 341㎡(103평)다. 여기에 143㎡(43평)의 부속건물과 394그루의 나무가 딸려 있다. 거듭 유찰되긴 했지만, 고택은 1차 경매에서 47억4284만 원에 나왔고, 2차 때는 34억1099만 원에 나왔다. 문화재청이 입찰 참여를 위해 마련했던 예산은 36억 원이다. 가늠해보면 건재고택의 값은 35억 원 안팎. 서울 강남의 중형 아파트 두 채 값 정도다. 하지만 운치와 내력으로 견준다면 건재고택을 어디 아파트 따위에 비할 수 있을까.

 건재고택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동이다. 정원은 진초록의 이끼와 기기묘묘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특히 사랑채 앞에서 자라는 수백 년 묵은 소나무 두 그루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의 귀물이다. 가지를 크게 휘어 자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는 무릎을 꿇고 집을 지키는 용 두 마리가 연상된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외암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20억 원에 사가겠다며 흥정했던 일본인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마을 뒷산인 설화산 계곡의 시냇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정원의 연못도 빼어나고, 그 연못 위에 놓은 무지개다리도 운치 있다. 정원 여기저기 배치한 괴석들도 기이하다. 처마의 현판은 물론이고 사랑채 기둥마다 추사를 비롯한 옛사람의 글씨를 달아놓아 서예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가을볕이 쏟아지는 창의 문살, 반들반들한 대청마루의 나뭇결, 안채로 이어지는 길에 쌓은 사이담…. 건재고택에서는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집은 비워져서 습하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와서 집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건만, 고택을 둘러싼 이들이 겪거나 벌인 흉사와 송사는 어지럽다. 풍류 넘치는 고택을 둘러보면서, 사람의 따스한 훈기가 깃들지 않은 집이 안쓰러워지는 건 그래서다.

 

신령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숲, 700m 수묵화 속 걸었네

 

 

충남 아산의 절집 봉곡사로 이어지는 길에는 마치 먹을 찍어서 그린 듯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천 년의 숲’으로 불리는 곳이다. 삼국시대 창건했다는 봉곡사의 내력도 만만치 않지만 봉곡사는 절집보다, 절집으로 이어지는 이 숲길이 단연 압도적이다.

 

# 검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성당

 아산에서는 공세리 성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종교적 건축물이 보여주는 검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공세리 성당은 1922년 건립된 충남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다. 성당이 서 있는 자리는 한때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옥천 등 40여 고을로부터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보관하던 공세창고가 있던 곳이다. 공세리 성당은 착공 1년 만에 완공했지만, 땅을 사서 성당을 짓기까지의 기간을 합산하면 20년이 넘는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에밀 드비즈 신부가 1903년 국유지였던 성당 부지를 매입한 것이 첫 단추였다. 드비즈 신부는 ‘이명래 고약’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성당은 ‘드비즈 신부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마련한 것도 그렇지만, 프랑스의 이름난 건축가 아버지를 둔 드비즈 신부는 성당을 직접 설계하고 감리·감독까지 했으니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처음 지어졌을 때 공세리 성당은 지금보다 더 소박했다. 크기도 지금의 절반 이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점거당해 공회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성당은 1970년 신자가 증가하자 북측의 제대 쪽을 헐어내고 317㎡(96평)를 증축해 495㎡(150평)로 늘려 오늘에 이른다.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초기 순교성당이라는 종교적 가치도 훌륭하지만, 소박한 정신과 우아한 건축적 미감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단정한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언덕 입구에서 자라는 수령 300년이 넘는 늙은 느티나무와 언덕 위의 붉은 벽돌 성당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공세리 성당은 인근 당진의 솔뫼성지와 신리성지, 예산의 여서울성지, 홍성의 홍주성지, 서산의 해미성지와 함께 천주교 순례길의 성지이기도 하다. 공세리 성당에서 솔뫼성지를 잇는 길이 천주교 순례길을 여는 ‘첫 구간’이다.

# 절집보다 숲길…아산 봉곡사

 아산에는 근사한 절집, 봉곡사도 있다. 봉곡사는 봉수산(鳳首山), 그러니까 ‘봉황새(鳳)’의 ‘머리(首)’를 이름으로 삼은 산자락에 있다. 봉곡사의 매력은 절집 자체보다 ‘절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주차장에서 봉곡사까지 700m 남짓의 부드러운 오르막의 깊고 짙은 소나무 숲길에 들어서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길 양옆으로 힘차게 뻗은 소나무 둥치가 겹겹이 겹쳐지는데 가깝고 굵은 것은 농담이 짙고 멀고 가는 것은 옅어지는 것이, 마치 세련된 붓질로 빠르게 그려낸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봉곡사 숲을 일러 ‘천 년의 숲’이라고도 부른다. 솔숲이 천 년이 됐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런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숲은 신령스러운 느낌으로 가득하다. 마침 봉곡사 마당까지 갔다가 비를 만나 촉촉하게 젖은 숲길을 걸어 내려왔는데, 안개가 스며든 숲길의 운치가 자못 감동적이었다. 

 봉곡사의 내력은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고 고려 때 보조국사가 고쳐 지었다고 전해진다. 120여 년 전쯤에는 근대의 고승 만공선사가 이 숲길을 걸어 들어가 스물다섯에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다고도 알려졌다. 오래된 역사에 비해 절집은 규모도 크지 않고 꾸밈새도 소박하지만, 들고 나는 길의 아름다운 솔숲만으로도 봉곡사의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숲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아산의 가을은 곡교천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아산 염치읍 곡교리에는 곡교천이 흐른다. 나무로 놓은 굽은 다리가 있어 그 다리를 ‘고분다리’라고 부르다가, 그 앞을 흐르는 하천이 ‘굽을 곡(曲)’에 ‘다리 교(橋)’자를 쓰는 ‘곡교천’의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곡교천은 가을이면 천변의 둑길을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면서 기막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매력적인 아산의 명소를 소중한 곳간 열듯 보여주던 이상득 아산시 관광과장은 이제 막 노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은행나무 숲길 앞에서 “가을이 깊어지면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했다. 노랗게 물든 절정의 은행나무 숲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계몽사의 창업주 일가가 40년째 지켜오고 있는 온양민속박물관은 사립박물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유 유물이나 시설 등이 훌륭하다. 사진은 박물관 마당에 모아둔 문인석들.  

 

# 사회적 책임과 온양민속박물관

 이 과장이 ‘나중에 꼭 다시 와달라’고 청한 곳이 한 곳 더 있었으니, 바로 온양민속박물관이다. 온양민속박물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지은 이는 출판사 ‘계몽사’의 창업주인 고 김원대 선생. 해방 직후 거리에서 책을 팔다 1946년 대구에 ‘계몽사’란 책방을 낸 그는 계몽사를 최고의 출판사로 키워냈다. 계몽사가 출간한 아동 전집류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큰돈을 번 그는 다양한 예술활동을 지원하며, 일개 출판사에 주어진 의무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문화적 책임을 다했다.

 그중 하나가 온양민속박물관이다. 김원대 선생은 아무 연고도 없고 부동산 투자를 할 만한 곳도 아닌 곳에다 모은 재산을 털어 넣고 돈도 되지 않는 민속품을 모아 민속박물관을 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의 입장에서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수집했던 문화재급의 유물을 모두 팔아 민속품을 사들이자 주변에서는 모두 ‘밑지는 장사’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옛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계열사의 골프장 인수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계몽사는 2003년 상장 폐지됐다. 창업주 일가는 이미 계몽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1998년 사업에서 모든 손을 뗐다. 그럼에도 창업주 가족은 온양민속박물관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돈을 벌기는커녕 적자로 지금도 계속 돈이 들어가고 있지만, 박물관장직을 맡은 창업주의 둘째 딸은 사재를 털어 가며 박물관을 지켜오고 있다.

 그 박물관이 오는 25일 4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15일부터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유물과 함께 박물관의 기록을 모아 특별기획전을 연다. 이 과장은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로 이어온 박물관의 40주년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축하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 토정 이지함, 그리고 삼일천하 김옥균

 

▲ 충남 아산의 공세리 성당. 붉은 벽돌의 소박한 성당은 단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마지막으로 아산의 인물을 보자. 아산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조선 초 명재상 맹사성 정도가 알려졌는데, 뜻밖의 인물도 있다. ‘토정비결’로 이름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 토정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보령에서 났지만, 아산과도 인연이 있다. 의학, 천문, 지리, 술서 등에 능했던 이지함은 주민들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돼 환갑을 넘긴 나이에 지금으로 치면 아산시장쯤 되는 벼슬인 아산 현감을 지냈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이지함은 걸인을 구제하기 위해 걸인청을 만드는 등 약자를 위한 구호사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젊고 튼튼한 거지들은 개간해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하게 했다. 생전의 행적을 보면 그는 음풍농월의 선비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비즈니스맨이자 경제 관료에 가까웠다. 

 아산에서 이지함의 자취를 보려면 영인면사무소로 가야 한다. 영인면은 이지함이 아산 현감으로 재직했을 당시 아산현 관아가 있던 곳이다. 면사무소 마당에는 이지함의 동상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있다. 

 이지함 동상이 세워진 건 1997년 12월. 따져보니 우리나라가 IMF 체제에 들어선 직후다. 사회안전망이 전무했던 시절, IMF 경제위기가 몰고 온 고통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이지함 동상을 세운 건 그 무렵이었다.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이 넘쳐나던 시절에 하필 걸인청을 세웠던 이지함의 동상이 만들어진 건 어쩐지 우연이 아니었을 듯싶다.

 걸인청은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영인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아산초등학교 입구에 이지함이 현감으로 재직했을 때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있다. 거기서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면 이지함이 이전했다는 아산향교도 있다. 부근에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에서 암살당한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의 묘도 있다. 김옥균의 양아들이 아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에 일본의 묘지에 묻힌 김옥균의 옷과 머리카락 등을 가져다 안장한 곳이다.

 

■ 여행정보

 아산은 오래전부터 온천 관광지로 이름났던 곳이라 숙소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에다 충무온천까지 더하면 아산의 온천은 4곳. 여행 일정에 온천욕을 끼워 넣는 게 좋겠다. 요즘 같은 가을에 아산에 간다면 곡교천 야영장(070-7747-1895~6)에서의 캠핑을 추천한다. 곡교천을 따라 4㎞ 남짓 이어진 은행나무 숲길을 끼고 있는 야영장에서는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야영요금은 평일 기준 1만5000원. 곡교천 야영장은 67곳의 야영 면을 보유하고 있으며 개수대, 화장실, 샤워장은 물론이고 야간조명시설 등도 갖추고 있다.

 야영 장비가 없어도 현장에서 텐트나 취사도구 등을 쉽게 대여할 수 있다.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곡교천 일대가 은행나무로 노랗게 물드는 가을날에 야영 면을 빌려 이곳에서 바비큐 파티 등을 즐기는 것도 추천한다. 실제로 가족 단위나 직장 동아리, 소모임의 바비큐 파티 장소로 인기가 높다. 야영장에서 온양민속박물관, 현충사 등이 차로 10분 거리다.

 야영장에서는 오는 13일 아악 뮤직페스티벌이 열린다. ‘아악’은 아산의 지명의 첫 자인 ‘어금니 아(牙)’와 ‘풍류 악(樂)’을 조합해 만든 이름. 언더그라운드 가수와 밴드들이 꾸미는 가을 정취 가득한 공연이다. 공연은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8시간 동안 이어진다. 입장료는 1만 원.

 

 

<출처> 2018. 10. 3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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