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가을 여행 '아산'
세속풍파 견딘 고택(古宅), '비밀의 문' 열다
아산 = 글·사진 박경일 기자
▲충남 아산 외암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조경과 건축미를 지녔다고 알려진 건재고택의 사랑채와 정원의 소나무. 후손의 빚과 금융기관의 불법대출 등의 사건에 휘말린 고택은 지금 예금보험공사 소유다. 건재고택은 그동안 문을 열어준 적이 거의 없는데, 경매를 앞두고 예금보험공사가 고택을 공개하고 있다.
# 외암마을에는 건재고택이 있다
충남 아산에는 외암마을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 제주 성읍마을처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외암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예안이씨 집성촌인 외암마을은 관광객들에게도 익히 알려졌지만, 마을 중심에 있는 ‘건재고택’은 대부분 모른다. 건재고택. 기억해두자. 외암마을을 갔다면, 아니 아산을 찾았다면 여기만큼은 꼭 가봐야 한다.
건재고택은 외암마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졌다. 그럼에도 아는 이들이 드문 건 건재고택의 솟을대문이 그동안 꼭꼭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고택이 최근에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늘 활짝 열어놓은 건 아니고, ‘청하는 이들만’ 안으로 들이고 있다. ‘아는 이들’에게만 보여주겠다는 집주인의 뜻이다.
건재고택의 주인은 문중의 후손이 아니라 뜻밖에도 ‘예금보험공사’다. 짐작하듯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다. 고택을 지키던 후손이 정원의 소나무 가격만 수억 원이 넘는다는 이 집을 담보로 70억 원을 빌렸다 갚지 못해 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 게 사연의 시작이다. 후손은 빚으로 집을 날린 뒤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건재고택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이는 훗날 불법대출로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5000억 원의 불법대출과 400여억 원의 횡령 등의 혐의로 8년형을 받고 복역 중인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서울대 법대생 사칭사건을 비롯한 사기 행각으로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김 회장은 외암마을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았던 김 회장의 아버지는 한때 이곳 외암마을에서 도지를 받아 생활했었다. 그런 외암마을에서 김 회장이 가장 큰 집인 건재고택을 손에 넣었으니 ‘머슴의 아들이 아버지가 일하던 대갓집을 사들인 셈’이었다. 건재고택을 손에 넣은 김 회장은 고택을 개인별장으로 꾸며놓고는 지인을 초대해 연일 술판을 벌였다. 추사 김정희의 외가이자, 조선 숙종 때 문신 이간의 생가인 유서깊은 고택이 흥청망청 여흥을 즐기는 술자리 파티장이 되고 만 것이다.
김 회장과 복잡하게 얽힌 채권 채무관계로 건재고택은 미래저축은행에 넘어갔고, 저축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고택은 경매에 부쳐졌다. 몇 번의 유찰 끝에 고택의 소유권은 주채권자인 예금보험공사로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문화재청이 긴급 인수예산까지 편성해 건재고택 입찰에 참여했으나 경매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으로 경매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건재고택의 외부 공개를 결정한 것은 예금보험공사다. 앞으로 다시 이뤄질 경매에서 제값을 받으려면 집의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매매를 위해 문을 연 것이니, 고택 공개는 한시적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지금이 건재고택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누군가 개인이 고택을 낙찰받는다면 언제 다시 문이 열릴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 건재고택은 얼마짜리 집일까
역사가 깃들어 있는 데다 빼어난 건축과 조경을 갖춘 오래된 고택의 가치를 어찌 평당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래도 궁금하다. 건재고택은 과연 얼마짜리일까. 경매가격으로 가늠해보자.
고택의 대지는 5714㎡(약 1728평)이고 건축 면적은 341㎡(103평)다. 여기에 143㎡(43평)의 부속건물과 394그루의 나무가 딸려 있다. 거듭 유찰되긴 했지만, 고택은 1차 경매에서 47억4284만 원에 나왔고, 2차 때는 34억1099만 원에 나왔다. 문화재청이 입찰 참여를 위해 마련했던 예산은 36억 원이다. 가늠해보면 건재고택의 값은 35억 원 안팎. 서울 강남의 중형 아파트 두 채 값 정도다. 하지만 운치와 내력으로 견준다면 건재고택을 어디 아파트 따위에 비할 수 있을까.
건재고택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동이다. 정원은 진초록의 이끼와 기기묘묘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특히 사랑채 앞에서 자라는 수백 년 묵은 소나무 두 그루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의 귀물이다. 가지를 크게 휘어 자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는 무릎을 꿇고 집을 지키는 용 두 마리가 연상된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외암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20억 원에 사가겠다며 흥정했던 일본인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마을 뒷산인 설화산 계곡의 시냇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정원의 연못도 빼어나고, 그 연못 위에 놓은 무지개다리도 운치 있다. 정원 여기저기 배치한 괴석들도 기이하다. 처마의 현판은 물론이고 사랑채 기둥마다 추사를 비롯한 옛사람의 글씨를 달아놓아 서예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가을볕이 쏟아지는 창의 문살, 반들반들한 대청마루의 나뭇결, 안채로 이어지는 길에 쌓은 사이담…. 건재고택에서는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집은 비워져서 습하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와서 집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건만, 고택을 둘러싼 이들이 겪거나 벌인 흉사와 송사는 어지럽다. 풍류 넘치는 고택을 둘러보면서, 사람의 따스한 훈기가 깃들지 않은 집이 안쓰러워지는 건 그래서다.
신령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숲, 700m 수묵화 속 걸었네
▲ 충남 아산의 절집 봉곡사로 이어지는 길에는 마치 먹을 찍어서 그린 듯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천 년의 숲’으로 불리는 곳이다. 삼국시대 창건했다는 봉곡사의 내력도 만만치 않지만 봉곡사는 절집보다, 절집으로 이어지는 이 숲길이 단연 압도적이다.
# 검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성당
▲계몽사의 창업주 일가가 40년째 지켜오고 있는 온양민속박물관은 사립박물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유 유물이나 시설 등이 훌륭하다. 사진은 박물관 마당에 모아둔 문인석들.
# 사회적 책임과 온양민속박물관
# 토정 이지함, 그리고 삼일천하 김옥균
마지막으로 아산의 인물을 보자. 아산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조선 초 명재상 맹사성 정도가 알려졌는데, 뜻밖의 인물도 있다. ‘토정비결’로 이름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 토정 이지함이다.
■ 여행정보
<출처> 2018. 10. 3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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