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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장성 봄빛 여행, 수직의 숲에 안겨 초록 맥박을 느낀다.

by 혜강(惠江) 2018. 3. 21.

 

장성=글·사진 박경일 기자

 

 

 

온통 곧은 것들로 가득한 수직의 세상. 여기는 전남 장성 축령산의 편백 숲이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린 편백 숲에서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무가 뿜어내는 청량한 향기만 출렁거렸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 우화루 처마 아래에는 고불매(古佛梅) 가 있습니다。 품격으로 겨루면 호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늙은 매화나무입니다。 그 나무 여윈 가지 끝에 분홍빛 매화 꽃망울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편백 숲이 온통 수직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축령산 숲에도 한결 짙어진 편백나무 향기가 봄의 당도를 알렸습니다。 고흐의 그림이 벽화로 단장된 북이면의 담장과 골목에도、 황룡강을 굽어보는 정자 요월정 뒤편의 솔숲에도 봄의 기운은 가득했습니다。 지금 남도 땅에는 봄 아닌 게 없습니다。 장성은 옐로 시티 를 표방합니다。 노란색이라면 봄입니다。 촉촉한 봄비 속에서 장성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줄곧 연상했던 건 뽀송뽀송한 솜털의 병아리 한 마리、 그리고 가볍게 쥔 손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맥박이었습니다。


# 매화나무 한 그루…절집이 그윽해지다

  백양사에는 고불매(古佛梅)가 있다. 백양사 절집 처마 아래서 봄이면 연분홍 꽃을 피우는 360세 먹은 홍매화 나무다. ‘고불(古佛)’의 뜻은 여럿이다. 오래된 부처를 뜻하기도 하고, 노스님을 일컫기도 한다. 나이가 많고 덕망 높은 늙은이란 뜻도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성자(聖者)를 뜻하기도 하고,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면목, 그 자리란 뜻으로 해독하기도 한다. 어떤 뜻으로 해석하든지 고불이란 그 이름이 붙은 것들을 치켜세우는 말임에 틀림없다.

 고불매는 이런 이름에 값한다. 우선 꽃 색이 곱다. 늙고 거친 가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고목의 품격을 드러내는 수형도 훌륭하고, 꽃가지를 슬쩍 담장 너머로 넘긴 채 꽃을 피우는 풍류도 그만이다. 여기다가 매화 향기도 짙다. 향기의 농도는 옅은데 희한하게도 한 그루 매화 가지에 핀 꽃의 향기가 절집을 가득 메운다. 이런 연유로 백양사의 고불매는 ‘호남 5매(五梅)’ 중 하나로 꼽힌다. 고불매 외에 선암사의 무우전매, 전남대의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 소록도의 수양매를 든다.

 고불매는 대웅보전으로 드는 우화루(雨花樓) 곁의 담장 아래 서 있다. 우화루의 우화는 ‘비 우(雨)’ 자에 ‘꽃 화(花)’ 자다. 꽃잎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뜻의 현판을 내건 처마 아래 고불매가 가지를 뒤틀고 서 있다. 고불매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한껏 꽃망울이 부풀었다. 개화 시기는 아마도 오는 주말쯤. 그리고 며칠이면 만개의 시간을 맞게 되리라. 사실 고불매의 본래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본래 백양사는 지금의 자리 북쪽에 있었는데, 1836년에 고쳐 지으면서 그때 절집 앞뜰에 심어두었던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 중 홍매 한 그루와 백매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옮겨 심은 백매는 그만 죽어버렸고 홍매만 여태 살아남았는데 살아남은 홍매에다 1947년 백양사에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붙여준 이름이 바로 고불매다. 

 

 

내장산국립공원의 백암산 백학봉 중턱에 들어선 암자 약사암에 올라서서 내려다본 백양사의 전경. 봄이 더 깊어지면 백양사는 숲의 연두색 신록으로 포위된다.


    

 

# ‘봄 백양사’ 눈부신 신록을 기다리다

  장성의 백양사는 백암산을 병풍처럼 뒤로 두르고 있는 절집이다.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했다. 내장산국립공원이라면 국립공원의 이름으로 삼은 내장산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국립공원 구역 안에는 장성의 백암산도 들어 있다.

 백암산은 내장산에 손색없을 정도로 가을 단풍도 빼어나지만, 내장산이 못 가진 그윽한 봄 풍경을 가지고 있다. ‘봄 백양, 가을 내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산은 내장산, 절은 백양사.’ 가을 내장산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얘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백양사가 내장산 버금가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리라. 내장산과 백양사를 병렬로 서술하고 있지만, 내장산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백양사를 얘기하는 문장이라는 얘기다. 백양사의 봄을 장식하는 건 연두색 신록이다. 절집으로 드는 들머리 숲길에는 아기단풍나무와 갈참나무, 느릅나무 고목이 늘어서 있는데 나뭇가지마다 매달리는 여린 신록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백양사의 가장 아름다운 신록은 백암산 백학봉 중턱의 암자 약사암에서 만날 수 있다.

 백양사에서 산중으로 들어 숲길을 따라 1㎞ 남짓, 순한 흙길을 600m쯤 가서 가파른 경사 400m를 더 가면 약사암에 닿는다. 급경사라 ‘갈 지(之)’ 자로 길을 뉘었어도 약사암으로 이르는 길의 경사 구간은 숨이 턱에 찬다. 경사 구간의 초입에 암자의 스님이 글 한 줄을 걸어놓았다.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잠깐 숫자가 뒤바뀐 게 아닌가 했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 가파른 길을 근육이 아니라, 생각으로 걸으라는 이야기이리라. 속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암자까지 걷기로 하자 숨과 몸이 금세 편해졌다.

 약사암 마당 끝 장독대 앞에 서면 저 아래로 백양사가 내려다보인다. 숲의 바다 한가운데 절집이 들어선 형국이다. 단정한 절집의 처마선이 숲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아직 신록이 이르니 마음속으로 연둣빛을 그려볼밖에…. 신록이 없어도 이럴진대, 만춘의 봄날에 여기서 온통 연두색으로 포위된 백양사를 내려다본다면 누군들 ‘봄 백양사’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 내리는 백양사 숲에서 만난 봄꽃들. 사진 왼쪽부터 생강나무꽃, 갈퀴덩굴, 둥근털제비꽃, 별꽃.

 

 

# 나무를 심어 기른 이가 ‘선생’인 까닭

  장성에는 내장산국립공원 못지않은 숲이 또 있다. 축령산 자락에서 하늘을 찌를 듯 자라는 편백나무 숲이다. 편백 숲이라고 하지만, 사실 편백과 삼나무가 어울려 자라는 숲이다. 축령산 편백 숲은, 믿어지지 않지만 ‘한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진 숲이다.

 이 숲을 만들어낸 이는 40년 전 일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임종국이다. 전북 순창 출신인 그는 스물다섯 살 때 장성으로 이주해온 뒤, 누에를 기르고 특용작물을 재배하다 1956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헐벗은 축령산을 사들여 대단위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빈 산에다 끝도 없이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다. 이렇게 1976년까지 596만㎡(181만5000평)의 땅에 나무를 심었다.

 임종국의 이름 뒤에는 ‘선생’이란 호칭이 따라붙는다.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예우와 존경의 호칭이 붙여진다. 나무를 심어 기르는 것도 따지고 보자면 농사의 일종일진대, 다른 농사일에 존경의 호칭이 따라붙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무를 심어 기른다는 것이 다른 농사와 왜 다를까.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걸었기 때문일까. 먼 미래를 보고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나무를 심어 기른 것에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황폐한 산에다 나무를 심어 기른 이들은 십중팔구 빈손이 됐다.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심고 가꾼 나무와 땅을 빚에 몰려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다. 나무를 돈으로 바꿔서 큰돈을 만졌다면 혜안이 있는 성공한 사업가였겠지만, 역설적으로 처참한 실패와 쓸쓸한 노후가 그들을 ‘선생’이 되도록 했다. 그의 실패로 말미암아 나무는 몇 푼 돈과 바꾸기 위한 재화가 아니라, 그 나무를 심어 기른 이의 고단하되 순수한 노동, 혹은 뜨거운 열정이 됐다는 것이다. 사업은 실패했으되 나무는 남아 아름드리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축령산의 편백과 삼나무로 가득한 수직의 숲속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이 숲에 바친 고단한 노동, 그리고 처참한 실패 때문이다.


# 의적 홍길동과 청백리 박수량



▲ 호남의 명매(名梅)로 꼽히는 백양사의 고불매. 360년 된 기품 넘치는 매화나무다. 나무는 늙었지만 해마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곱고 여린 꽃을 내어놓는다.

 장성 출신의 인물 중 가장 이름난 이가 누구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홍길동이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홍길동 말이다. 허구의 소설 속 인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홍길동은 실존인물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행적과 딱 맞아떨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홍길동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100번이 넘게 등장한다. 간추리자면 홍길동은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에서 서자로 태어난 도적이다. 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은 활빈당을 이끌고 율도국으로 갔지만, 탐관오리의 재물을 털어 농민들에게 나눠주던 조선왕조실록의 홍길동은 1500년 의금부에 의해 체포됐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장성군은 ‘홍길동과의 연고’를 주장하며 강릉시가 소유한 11개 홍길동 관련 상표등록 취소심판 소송에서 승소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고향이란 인연을 앞세워 강릉시가 등록해 둔 홍길동의 상표권을 하루아침에 장성군이 빼앗아온 것이었다. 장성은 이렇게 홍길동을 가져다가 73종의 캐릭터를 개발해 상표등록을 마쳤고 해외 국제 특허도 출원했다.

 이 과정에서 장성에 만들어진 것이 홍길동 테마파크다. 테마파크라지만 탈것이나 놀이시설이 있는 건 아니고 한옥 숙소와 너른 초지, 분수, 영상관, 기념관 등을 갖춘 공원이다. 흥미로울 건 없지만 한옥 툇마루에서 봄볕을 즐기며 여유 있게 쉬어가는 곳으로는 훌륭하다. 입장료도 주차료도 없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역할을 부여하지 못한 캐릭터의 한계다.

홍길동 대신 근래 장성이 ‘밀고 있는’ 인물은 조선 중기의 청백리 박수량이다. 박수량은 한성판윤부터 형조, 예조, 공조, 호조판서까지 두루 벼슬을 역임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 법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지낸 셈인데, 39년간 공직생활을 했음에도 어찌나 청빈했던지 죽은 뒤 상여 멜 돈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박수량이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명종 임금은 서해에서 캔 돌을 비석으로 내려보내며 ‘생전의 청빈함이 욕되지 않도록 비문을 새기지 말고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박수량의 묘 앞에 아무런 글씨를 새기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가 서 있는 내력이다. 백비가 공직자 청렴의 상징이 되면서, 박수량 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의 교육이나 연수프로그램의 단골 목적지가 됐다. 청렴함을 보고 배우겠다는 걸 나무랄 일은 없지만 그저 조용하게 묘를 둘러보고 마음에 새기면 될 일인데,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시멘트 벽에다 다녀간 기관과 단체의 현판을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음에도 글자 한 자 남기지 않은 선비의 비석을 보면서도 그리하고 싶었을까.


#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초록색



  장성은 ‘옐로 시티’를 표방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 ‘옐로 시티 장성’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노랑이란 상징색을 통해 일관성 있는 관광자원화 작업과 관광마케팅을 진행하기 위한 지자체의 신선한 전략이다. 왜 하필 노란색일까. 스토리텔링을 곁들인 장성군의 설명이 이렇다. 장성의 젖줄인 황룡강 깊은 물에 황룡이 살았는데 부족 마을로 내려가 지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됐고, 이로써 장성은 노란색으로 시작된 도시가 됐다는 얘기다. 장성군은 노란색에서 연상하는 꿈과 희망, 아늑함, 따스함 따위를 지향하는 가치로 삼았다.

 옐로 시티 장성에서 가장 강렬한 노란색은 백양사역이 있는 장성군 북이면에 있다. 북이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주변의 담장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다. 노란색의 상징 화가 반 고흐의 그림들이다. 면사무소 벽면에는 ‘오베르의 평원’이 있고 긴 담장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려져 있으며 낮은 담장 아래는 고흐의 자화상이 있다. 몽마르트르의 거리 풍경, 해 질 녘의 밀밭, 씨 뿌리는 사람, 아를의 밤의 카페, 집배원 조제프 룰랭,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그의 해바라기 그림은 아예 액자를 빠져나와 담장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다. 벽화로 그려낸 정교한 모사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듯하다. 명작의 모사는 자칫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담장의 벽화는 따스하고 흐뭇한 쪽에 더 가깝다.

 전국 곳곳에 비슷비슷한 벽화 마을이 워낙 많아서 ‘벽화공해’라는 말까지 생겨났지만, 이곳 북이면의 벽화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북이면의 사거리 오일장이 서는 1일과 6일에 맞춰 찾아간다면 장 구경과 마을 벽화 구경을 다 할 수 있다. 사거리 오일장에는 장날에만 손님을 받는 장성식당이 있는데, 밥과 스무 가지에 가까운 맛깔나는 반찬을 차려내고 4000원을 받는다. 장날 좌판을 편 상인들 거의 전부가 여기서 밥을 대다 먹어 흡사 ‘오일장 구내식당’ 같은 분위기다. 술손님에게는 반찬을 상에 가득 차려 놓고는, 술값만 받는 식으로 영업한다.

 장성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또 있다면 황룡면의 요월정 원림이다. 조선 명종 때 공조 좌랑을 지낸 김경우가 500여 년 전 산수와 벗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짓고 조성한 정자와 원림이다. 황룡강 변에 들어선 정자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찾아와 노닐며 시를 읊었다. 원림에서 눈이 가는 건 배롱나무다. 초록빛이 짙어가는 언덕에 들어선 정자 주위를 제법 굵은 배롱나무들이 호위하고 있다. 정자 뒤에도 배롱나무 군락이 있어 붉은 꽃이 선홍색으로 피어나는 여름날이면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 배롱나무는 지금 빈 가지뿐이지만 정자 뒤편 언덕 위의 청량한 진초록 솔숲이 아쉬움을 덜어준다. 장성에는 고흐의 노란색도, 배롱나무의 붉은색도, 솔숲의 초록색도 있다.


■ 여행정보



백양사·축령산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IC나 백양사 IC로 나와서 1번 국도를 탄 뒤 북하면 약수교차로에서 좌회전, 중평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백양사에 닿는다. 축령산 편백 군락지에는 국립장성숲체원이 있고, 숲체원이 조성한 ‘치유의 숲’이 있다. 군락지는 숲과 이어진 길이 여럿이라 지도를 놓고 보면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헷갈린다. 세 곳의 들머리에 각각 주차장이 마련돼 있는데 거기를 목적지로 찾아가는 게 요령이다.

 하나는 금곡 영화마을 쪽 들머리.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500번지를 입력하면 된다. 두 번째는 모암리 입구다. 주소는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682번지. 나머지 하나가 축령산 안내센터와 가까운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699번지다.

숲체원 직원은 “특별히 다른 목적이 없다면 축령산 정상이나 산림치유 안내센터가 가장 가까운 추암리 699번지로 찾아올 것”을 추천했다. 차량 내비게이터에 이 주소를 입력하고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뒤에 차를 대놓고 걸어가면 된다. 오르막 시멘트 임도를 20∼30분쯤 걸으면 산림치유 안내센터에 닿는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장성을 둘러보려면 백양사 부근의 숙소나 광주의 숙소를 택하는 것이 낫겠다. 백양사 아래 백양관광호텔(061-392-2114)이 있다. 근래 객실을 손봤다. 장성과 거리가 가까운 광주송정역 인근에서 묵는 것도 추천한다. 야시장으로 이름난 1913송정역시장 부근의 마드리드비지니스호텔(062-941-0500)을 추천한다. 객실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시설도 나무랄 데 없다. 인근에 아우라비즈니스호텔(062-942-0060)과 호텔 더 솔(062-941-3009)도 있다.

 장성에서는 메기매운탕을 내는 초야식당(061-393-0734)이나 산채정식으로 이름난 백양사 초입의 별궁민속식당(061-392-7401)을 추천한다. 한정식을 내놓는 풍미회관(061-393-7744)이나 두부전골을 전문으로 내는 단풍두부(061-392-1515) 등도 이름난 곳이다. 꿩샤부샤부로 이름난 산골짜기(061-393-0955)도 지역주민들이 추천하는 맛집이다. 송정역시장 인근은 떡갈비 골목으로 이름났는데, 떡갈비보다 태국음식점 타이푸드(062-944-1370)를 먼저 추천한다. 태국인 손님들을 주로 상대하는 소박한 집인데, 태국의 맛을 그대로 낸 수준급의 음식을 낸다.

 

<출처> 2018. 3. 21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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