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8도에 찾아간 팔당호
웅~ 웅~ 얼음 뒤집어 쓴 호수의 목소리를 들어봤나요
남양주 = 표태준 기자
1973년 태어난 인공호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북한강·남한강·경안천 3개 강줄기 합쳐 호수로
소로의 마음 품고 팔당호로
美 사상가 데이비드 소로 절망하고 싶지 않아
월든 호수가에 오두막집 2년 넘게 은둔하며 사색
다산이 즐겨 걸었던 길
3.4㎞ 다산길 제2코스 소내나루 전망대 오르면
유배지서 돌아온 심경 담은 다산의 詩 한수가…
정약용 생가 '여유당'
집 바로 뒤 동산에 부인과 함께 묻혀 소나무로 뒤덮여 유난히 푸르러
▲ 눈 덮인 평원 같아 보이지만 실은 호수다. 1월 26일 찾은 팔당호는 최저기온 영하 18도의 강추위에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매년 1~2월 한파가 찾아올 때면 팔당호는 얼음 밑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중천에 뜬 해가 야속하게 한강을 빛으로 수놓는다. 물이 차갑기보다 차라리 뜨겁다고 느껴질 때쯤 팔당댐을 지났다. 댐은 흐르는 것들을 막아선다. 그 너머는 멈춰 선 것들의 세계. 댐 건너편에 다다르자 두 눈을 의심한다. 속절없이 흐르던 물이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들판만 끝없이 펼쳐졌다. 누가 저것이 몇 주 전만 해도 사실은 물이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게 정말 물이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눈을 뒤집어쓴 호수에 다가간다. '이게 정말 호수였나' 싶어 호수 가장자리에 쌓인 눈을 신발로 걷어낸다. 눈 아래 감춰져 있던 두꺼운 얼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호숫가에 쪼그려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진 탓인지 속 깊은 호수는 오랫동안 말이 없다. 듣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귀 기울이니 얼음 아래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온다. '웅-, 웅-'
▲1 다산유적지에서 바라본 팔당호의 모습. 북한강에 가까워질수록 빙하는 얇아진다. 2 다산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거중기 모형./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남양주시
"수많은 사람이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아간다." 이 말을 한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절망하고 싶지 않아 호수로 향했다. 184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작은 호수 '월든(Walden)' 근처에 직접 오두막집을 지었다. 하버드대학을 나온 27세 젊은 시인은 그곳에서 2년2개월을 호수와 숲과 나무와 대화하고, 사색(思索)했다. 강줄기에서 벗어나 호수처럼 멈춰 선 것이다. 그는 목적 없이 일과 돈과 명예를 향해 휩쓸리듯 내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 삶의 끝에는 절망이 있기 때문이다.
소로의 마음을 품고 팔당호로 향한다. 서울을 등지고 다산길을 따라 호숫가를 걷는다. 트레킹 명소답게 길이 잘 닦여 있다. 바닥이 얼어 다소 미끄럽긴 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다른 계절이었다면 산책하고 자전거 타는 이들로 붐볐겠지만 겨울 다산길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다. 가끔 차 소리와 갈대와 대나무, 부들 따위가 부비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날 4시간 넘게 걸으며 만난 이가 채 10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낯가림 심한 팔당호에 말을 건네기 부담 없다.
팔당호는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人工湖)다. 총저수량만 2억4400만t에 달하니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북한강과 남한강, 곤지암 쪽에서 흘러드는 경안천 등 3개의 강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호수를 이룬다. 서울로 향해 휩쓸려 내달리던 것들은 팔당댐에 머리를 처박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멈춰 선다.
▲3 ‘여유당’이라고 이름 붙여진 정약용의 생가. 4 여유당 생가 뒷동산에는 정약용과 그의 부인이 함께 묻힌 묘지가 있다. 5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다산길. 겨울이면 한산해 사색하며 걷기 좋다./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다산생태공원에 다다른다. 나무는 잎을 모두 털어냈는데, 공원 길을 따라 줄지어 선 갈대는 아직도 바랜 잎을 붙잡고 있다. 이내 팔당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소내나루전망대가 눈에 띈다. 전망대 위에 올라서면 얼어붙은 팔당호를 배경으로 다산의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고향인 이곳을 떠나 한양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던 다산은 정조가 죽은 후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며 느꼈던 심경을 담은 시가 '배 타고 소내로 돌아가며'다.
한강에 외배 띄우니
▲ 팔당역 근처에 있는 예봉산은 일출 명소로 유명하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다산길 제2코스의 길이는 약 3.4㎞이지만, 천천히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 등을 둘러보며 걷다 보면 2시간이 훌쩍 넘게 걸린다. 거리를 얕잡아보고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에 날이 예상보다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함께 팔당댐 너머에 놓고 왔던 고민들이 머릿속에 밀려온다.
서둘러 두물머리를 지나 북한강변을 따라 올라가면 있는 운길산역으로 향한다. 북한강에 가까워질수록 두껍던 얼음은 얇아지고, 호수는 서서히 속살을 드러낸다. 빙하가 녹으며 군데군데 찢어지는 고통 탓인지 나지막했던 호수의 목소리는 다급해진다. '웅-, 웅-.' 포효에 가까운 호수의 소리가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발목을 붙잡는다.
▲ 참숯에 구워 먹는 장어구이로 헛헛함을 달랜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다산유적지에는 여유당 생가와 묘지 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실학박물관(031-579-6000)은 실학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볼 수 있는 각종 자료와 실학과 관련된 천문 관측 기구나 책력, 지도류 등이 전시돼 있다. 관람객들이 별자리 찾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다산기념관(031-590-2837)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특히 실제 크기의 4분의 1로 복원한 거중기가 눈길을 끈다. 기념관 바로 옆에는 다산의 학문 세계를 조명한 다산문화관이 있다. ‘다산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다섯 가지 주제를 그래픽 패널로 전시했다. 세 곳 모두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모여 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월요일과 설날·추석 당일은 휴관이다.
추위 속에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양기를 보충해줄 먹을거리가 생각난다. 덕분에 한때 팔당호에서 북한강으로 향하는 강변 일대는 장어구이 집으로 즐비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장어구이 집을 찾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일반음식점 허가를 받지 않고 무허가 영업을 하거나 건축물을 불법 중축해 장사를 해오던 곳들이 무더기로 적발되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북한강변을 쭉 올라가며 얼마 남지 않은 장어구이 집을 찾아나선다. 크진 않지만 북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식당 앵골터(031-576-7694)에 들어갔다. 숯불에 구운 장어구이와 민물고기가 가득한 매운탕으로 헛헛한 속을 덥힌다.
[출처] 2018. 2. 2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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