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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융건릉, 산책길을 걸으며 정조 대왕의 효심을 배우다

by 혜강(惠江) 2017. 11. 8.

 

수원 융건릉

 

산책길을 걸으며 정조 대왕의 효심을 배우다.

 

 

글·사진 남상학

 

 

 

 

융릉·건릉 입구에 자리한 역사문화관

 

 

  융건릉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에 위치한 조선 왕릉이다. 융건릉은 조선 영조의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莊祖, 1735∼1762년,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1735~1815, 혜경궁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 1752~1800)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健陵)을 합쳐 부른 이름이다. 융릉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고, 건릉은 10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융건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중에서 숲길이 가장 아름다워 산책하기에 좋다. 서울 근교에도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나들이 명소가 많지만, 사도세자와 영조의 능이 있는 융건은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명소다. 두 왕릉을 둘러볼 겸 산책하며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 융건릉으로 향했다. 산책에 앞서 우선 입구에 자리한 역사문화관에서는 조선 왕릉과 융건릉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고 숲길로 들어섰다.

 

 

 

외부에서 본 융건릉 재실

 

 

 

 

융건릉 재실 뜰에 자라는 개비자나무 

 

 

  융릉과 건릉은 매표소를 기준으로 좌우로 나누어져 있다. 어느 쪽을 먼저 들러도 상관은 없다. 매표소에서 융릉에 이르는 500m의 오솔길로 들어섰다. 머릿속을 맑게 씻어내는 아름다운 산책로다. 입구부터 펼쳐진 뿌리 깊은 소나무 숲길은 융릉과 건릉 향하는 길이 두 갈래 길로 나뉘는 지점까지 펼쳐진다. 여기기 바로 융릉과 건릉으로 갈리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융건릉 역사문화관 내의 전시 자료들

 

 

융릉과 건릉 배치 및 산책로

 

 

문화해설자가 오기 전까지 오용환 교장이 전공을 살려 해설하고 있다.

 

 

일행이 문화해설사로부터 융건릉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깃든 융릉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선(愃, 사도세자)은 뒤주 속에 갇혔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선은 마침내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융릉은 조선 중기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비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다. 뒤주 속에 갇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효성은 지극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정조는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였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배웅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있던 것을 사도세자의 묘는 수은묘(垂恩墓)로 불리었으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고,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그 후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는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로 올렸다. 그리고 융릉은 황제의 능으로 격상되었다. 융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묘, 원, 능라는 명칭을 모두 거친 유일한 능이다. 

 

  생전에 다 하지 못한 효도를 보상하려는 듯이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하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구릉에 숲을 우거지게 하고 온종일 따뜻한 햇볕이 드는 자리에 부모를 모셨다. 또 정조는 현륭원을 조선시대 어느 능보다도 화려하게 치장했다. 능 주변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능을 한 바퀴 두른 석축 또한 꽃문양의 화려한 조각으로 수놓았다. 융릉은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석, 비각이 배치되었다.

 

 

  융릉에서 숲길을 가로질러 건릉까지 700m를 걸어가는 산책로 또한 흥겨운 발걸음이 이어지긴 마찬가지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을 만큼 평탄하다. 솔숲으로 난 길을 따라 700m 가면 중종과 효의왕후가 묻힌 건릉이다. 주말에는 조금 길게 산책을 할 수 있다. 융릉에서 뒤로 돌아 건릉으로 간 후 매표소로 돌아오는 코스는 4㎞쯤 된다. 1시간 30분쯤 잡으면 무리가 없다. 길다 싶으면 건릉과 융릉 사이로 난 길로 내려온다. 이 길은 건릉에서 융릉으로 가는 지름길과 만난다. 또 융건릉은 잘 다듬어진 숲과 너른 잔디밭이 있다. 도시락과 깔개를 준비하면 행복한 가을 소풍이 된다. 마침 유치원생들이 소풍을 줄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면 앞에 세운 붉은 물감을 칠한 홍살문, 그 뒤로 비각, 정자각, 멀리 융릉이 보인다.  

 

 

건물은 융릉의 정자각,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곳이다.

 

 

융릉을 관람하고 이동하고 있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 건릉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융릉에서 불과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재위 24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융릉의 동쪽 언덕에 묻혔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여론 때문에 효의왕후가 죽으면서 1821년 융릉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되었다.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남긴 아들 정조는 스물다섯 살에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22대 임금에 올랐다. 이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정조 대왕이다. 고통 속에 죽어가던 아버지의 최후를 열한 살 때 목격한 정조는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평생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한지 열흘 만에 아버지의 묘소 호칭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꿨다. 그리고 묘소는 1789년에는 윤선도가 ‘천 년에 한 번 나올 명당’이라 극찬했던 경기도 화성시 송산리 인근의 화산 자락으로 이전하고 호칭을 ‘현륭원’으로 다시 고쳤다. 그리고 일 년에 2차례 이상씩 참배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자주 찾은 이유이다.

 

  행차 때 임금이 머물 행궁이 필요했고, 신도시 수원을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삼고 싶어 했던 꿈이 화성 건설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다.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건릉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아버지의 융릉처럼 장대한 모습은 아니다. 융릉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반면 정조의 능은 그의 사후 유신들이 융릉처럼 만드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릉으로서의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다. 능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넓은 잔디 묘역 중간 왼쪽으로 재실이 있다. 능은 재실 위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능에는 석상과 망주석, 문·무인석이 있다.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지만,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고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융릉에서 건릉으로 산책길을 따라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다.

 

 

 

 

 

윤릉의 원찰 용주사(龍珠寺)

 

 

 

 

 

  정조의 효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릉원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절 하나를 지어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게 했으니 그게 바로 오늘의 용주사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지어진 길량사란 절을 허물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현륭원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건한 사찰이다.

 

  용주사는 여느 절처럼 숲길로 이어진 진입로가 없다. 대신돌을 깔아놓은 50m쯤의 판석 진입로 좌우에 표석을 열 지어 세워놓았다. 1∼1.5m에 이르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세워 놓았는데, 각각의 표석마다 한문 각자가 새겨져 있다. 

 

  용주사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 원찰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용주사 입구에는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보통 왕릉, 서원, 향교 등에 세워지는 유교적인 성격의 출입문이다.

 

  출입문도 서원이나 사당처럼 삼문의 형식으로 문간채 사이에 솟을대문 형태로 지어졌다. 중앙문은 닫혀 있고, 혼령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틈이 있다. 양쪽에는 능행시 수행원들이 잠시 묵을 수 있도록 긴 행랑채를 두고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석탑이 있고, 서쪽 편에는 최근에 만든 범종이 있는 불음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위채를 모신 사당인 호성전을 두고 있다. 판석이 깔려 있는 신도는 사도세자의 위패가 모셔진 호성전까지 연결된다. 호성전 앞에는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비석

 

  1. 아기를 가지고 지켜 주신 은혜

  2. 아기를 낳는 고통을 이겨 내신 은혜

  3.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4.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여 주시는 은혜

  5.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아기를 보살펴 주신 은혜

  6. 젖을 먹여서 길러 주신 은혜

  7.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신 은혜

  8. 먼 길을 떠날 때 걱정해 주시는 은혜

  9. 자식을 위해 나쁜 일까지 감히 하시는 은혜

10.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용주사는 사도세자(장조)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절로 용주사의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정조가 그 내용을 판에 새겨 보관하게 하였다. 부모님의 열 가지 은혜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준다.

 

  대웅보전은 이 절이 창건될 때 지어진 건물이다. 지붕 너머로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훤칠한 이마를 내보인다. 대웅보전 오른편에 ‘부모은중경’ 비석이 있다. 불교의 경전 ‘불설 대부모은중경’을 우리말로 풀어서 새긴 비석이다.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한 정조가 사무친 한으로 훗날에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라는 뜻에서 만든 것이다.

 

 

 

용주사 안내도

 

 

돌을 깔아놓은 50m쯤의 판석 진입로 좌우에 표석을 열 지어 세워놓았다. 1∼1.5m에 이르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세워 놓았는데, 각각의 표석마다 한문 각자가 새겨져 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서원이나 사당처럼 삼문의 형식으로 문간채 사이에 솟을대문 형태로 지어진 출입문이 특이하다.

 

 

대웅보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1942호로 지정된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사도세자의 위패가 모셔진 호성전 앞에는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용주사 관음전 범종각 우측 건물은 천불전이다.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꽤 먼 곳에서 위치한다. 지하철 1호선 병점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이 가장 빠른 편이다. 광역버스 중에 1551번 버스가 융건릉 앞에 정차한다.

 

<먹을 곳>

  융건릉 주변은 수원 왕갈비 맛을 살린 집들이 여럿 있다. 윤건릉 바로 앞에 있는 ‘한국인의 밥상’(안녕동 186-71, 031-222-3700)은 밥과 국이 기본으로 각종 나물반찬, 김치, 전 등 물리지 않는 반찬들이 가득하다. 길성이백숙(안녕동 188-216, 031-222-0594)은 융건릉 앞에서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운영된 누룽지백숙 맛집이다. 오리주물럭, 쟁반막숙수도 있다.

 

 

'한국인의 밥상' 입구와 상차림

 

 

점심식사 후에는 찻집에서 차 한 잔의 여유로운 시간도 가졌다.

 

 

 

<출처> 시솔길을 함께 걸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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