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및 정보/- 프랑스, 독일

독일의 숨은 매력 작센안할트

by 혜강(惠江) 2016. 5. 22.

 

독일의 숨은 매력  작센안할트

 

 

중세와 현대, 종교와 예술, 유럽의 역사가 축약된 '공존의 땅'

 

 

 

▲작센안할트주 주도인 마그데부르크의 전경. 이곳을 신성로마제국 첫 수도로 삼았던 오토 대제가 묻힌 대성당과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그린 시타델의 황금색 돔 등이 중세부터 현대까지 숱한 격변을 겪어온 마그데부르크의 역사를 보여준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30분을 가면 독일 16개 주 중 하나인 작센안할트주(州) 주도(州都)인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합니다. 마그데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작센안할트에서 만나는 독일의 모습은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 도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고성을 자랑하는 유럽의 주요 지역과도 또 다른 모습이지요.

 유럽에 흔한 시골 지역 같으면서도 왠지 모를 계획성이 엿보이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현대적인 면을 물씬 풍기면서도 속을 보면 과거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독일에서 만나리라고 상상도 못 했던 동화 같은 곳이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작센안할트가 독일 역사, 아니 세계 역사에서 지닌 독특한 위치에서 품어져 나오는 체취일 겁니다.

 동프랑크왕국의 수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발상지, 현대 건축사의 상징 바우하우스 등을 품고 있으면서도 과거 동독에 속했던 역사가 작센안할트 지역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 4곳이 마그데부르크를 중심으로 60~80㎞ 내에 모여 있을 정도로 문화적 전통이 깊은 것도 작센안할트의 독특함을 배가시키지요. 그 역사적·문화적 위상에 비해 우리에게는 낯선 곳, 그래서 찾아낼 수 있는 매력이 남다른 곳, 바로 독일 작센안할트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를 품에 안은 도시-마그데부르크



▲ 중세 도시의 모습을 온전히 갖춘 크베들린부르크

 

 마그데부르크는 ‘오토의 도시’라는 별칭을 안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을 세운 오토 대제(912~973)가 첫 수도로 삼았던 도시, 반구 실험으로 대기압 크기를 실증한 오토 폰 게리케(1602~1686)가 시장으로 있던 도시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강을 끼고 있는 어촌 도시였다. 도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오토 대제가 962년 첫 수도로 삼으면서부터다. 이후 주교 관구가 되면서 완전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던 대성당은 1207년 대화재 때 완전히 소실됐고, 현재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모습은 1209년부터 300여 년간 공사를 거쳐 갖춰졌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은 역사의 무게에다 정교한 조각의 예술성으로 찾는 이들에게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검은빛이 도는 대성당 바로 옆에는 분홍색 몸체에 황금색 돔을 얹은 건물이 있다. 마치 역사와 종교로 치장된 무거운 도시에 부드러움을 주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마지막 유작, 그린 시타델(녹색 요새)이다. 2005년 완공된 이 건물에는 아파트와 사무실, 호텔, 상점 등이 들어서 있는데, 건물 곳곳에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있어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신성로마제국 첫 수도가 된 뒤 번영을 누리던 마그데부르크는 30년 전쟁의 와중이던 1631년 폐허로 변했다. 당시 남은 건물이 대성당과 주교 관저, 시장 관저 3개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30년 전쟁 후 버려진 것과 다름없던 도시를 복원한 이가 바로 오토 폰 게리케다. 그는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역사에 다시 한 번 마그데부르크의 이름을 남겼다.

 두 명의 오토가 세우고 재건한 도시답게 마그데부르크 시내 한가운데 있는 구시청사 앞에는 금색으로 칠해진 오토 대제의 동상이 서서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는다. 구시청사 옆에는 오토 폰 게리케의 청동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구시청사 뒤로는 성 존 교회와 그 앞에 선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이곳이 신교의 도시임을 웅변한다. 1517년 종교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7년 뒤인 1524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설교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신교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과 구시청사 등 마그데부르크 내 주요 볼거리가 있는 지역은 서로 몰려 있어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과 그린 시타델이 있는 지역과 구시청사와 성 존 교회가 있는 지역 간 거리는 트램 한 정거장밖에 되지 않으니 도보여행 삼아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중세를 도시에 온전히 담은 곳-크베들린부르크

 

 

 마그데부르크에서 동남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크베들린부르크는 919년 동프랑크 왕이 된 하인리히 1세가 수도로 삼은 곳이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오토 대제가 귀족 미혼 여성 교육기관인 성 세르바티우스 협동교회를 세우고 도시에 동전 주조권 등 특전을 주면서 도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성 세르바티우스 협동교회에는 하인리히 1세의 무덤이 있다.

 크베들린부르크에 남아있는 중세 거리 형태와 성 세르바티우스 협동교회, 독특한 목조건축 양식 건물들은 번영했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중세를 온전히 담고 있는 덕에 교회와 성채, 구시가지는 모두 1994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성 세르바티우스 협동교회와 성채는 과거 나치 시절, 나치가 성지로 삼았을 정도로 독일에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유럽에서도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목조 건물들을 갖춘 크베들린부르크를 걷다 보면 동화책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중세의 거리처럼 닳고 닳은 돌들이 깔린 좁은 길 좌우에는 짙은 갈색 나무 골격과 형형색색의 벽으로 꾸며진 건물들이 줄지어 여행객을 맞이하는 탓이다. 겉으로 드러난 나무 골격과 그 사이를 돌, 흙 등으로 메우는 목조건축 방식인 ‘하프팀버(반목조)’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들은 도시를 찾는 이들에게 이국적인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전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던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면한 몇 안 되는 도시여서인지 크베들린부르크에는 하프팀버 양식으로 지어진 2000여 개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중세 하프팀버 양식의 건물이 대규모로 남아있는 도시는 유럽, 특히 중부 유럽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다. 붉은색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들은 일정하지도, 반듯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간다. 진한 색의 나무 골격과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벽면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건물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또 겉으로 드러난 나무 골격들은 3~4층 건물을 마치 하나가 아니라 블록을 쌓아놓은 커다란 장난감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불규칙함과 색상, 블록 형태 등이 어우러져 3~4층 높이의 건물들이 늘어선 사이의 좁은 도로를 걷는 이들에게 위압감보다는 묘한 안정감과 따뜻함을 준다. 이러한 건물 배치와 풍경은 중세 시대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크베들린부르크는 중세가 배경인 영화의 단골 촬영지 중 하나다.

 

 

▲계몽주의 철학이 담긴 데사우뵐리츠 정원.

 

 

 

#종교 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의 활동지-비텐베르크

 


 마그데부르크로부터 서남쪽으로 9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텐베르크는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소도시.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지다. 비텐베르크는 바로 루터가 1517년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테제를 발표하면서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린 곳이기 때문이다. 오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비텐베르크는 내년에 찾아올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텐베르크 초입에는 보수 공사가 한창인 비텐베르크 성 교회가 서 있다. 궂은 날씨에도 성 교회로 관광객들이 모여든 것은 이 교회 문이 루터가 95개 테제를 걸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보수를 마쳤다는 교회 청동 문은 당시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내세웠던 테제가 새겨져 있다.

 성 교회를 따라서 난 큰길을 따라 걸으면 도시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비텐베르크 시청이 여느 유럽 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장 한가운데에는 루터의 동상이 서 있다. 날씨는 흐리고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광장 곳곳에는 루터 동상을 사진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분주했다. 루터의 동상 옆에는 루터의 평생 동지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의 동상이 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 개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인물이다.

 시청에서 보이는 두 개의 탑이 있는 건물을 찾아가면 또다시 북적이는 관광객과 만나게 된다. 루터가 2000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는 성 마리아 교회다. 루터가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하며 사용했던 목재 설교대는 루터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성 마리아 교회에서 도심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루터가 35년간 살았던 집이 있다. 1508년 비텐베르크에 도착해 처음에는 수도사로서, 1525년부터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았던 집이 지금은 루터 박물관으로 변신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루터 박물관은 그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1996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박물관에는 청년 모습의 루터와 중년인 루터, 노년에 접어든 루터, 고인이 된 루터 등 다양한 모습의 루터를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종교 개혁의 불쏘시개가 된 독일어 성서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테제가 적힌 메모, 그가 입었던 수도복 등이 전시돼 있다. 루터가 살았던 방과 교회 개혁의 상징인 공동 금고도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공동 금고는 교회와 시 당국, 시민대표 3명이 가진 열쇠 3개가 모여야만 열 수 있었다. 금고 수익은 목사 월급과 교회 관리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복지 비용에 사용됐다. 루터 박물관에 전시된 면죄부를 팔고 받은 돈을 모아둔 면죄 금고와 교황청이 루터에게 파문을 경고하며 보낸 칙서 등은 당시 루터와 교황청 간 갈등의 원인과 골의 깊이를 보여준다.

 

 

#계몽주의 철학이 담긴 유럽대륙 최초의 영국식 정원-데사우뵐리츠 정원



▲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비텐베르크.

 

 

  145㎢에 달하는 면적에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사우뵐리츠 정원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담겨 있는 곳이다. 데사우뵐리츠 정원은 마그데부르크에서 서남쪽으로 약 60㎞ 거리에 있다. 데사우뵐리츠 정원을 가로지르는 엘베강 지류를 이용해 배를 타고 공원을 간단히 둘러보는 데만 20분이 걸릴 정도로 넓고, 볼거리도 곳곳에 놓여 있다.

 데사우뵐리츠 정원의 시작은 1683년 이래 궁전과 공원, 도시를 통합하는 설계 아래 오라니엔바움을 세운 것에서 시작했다. 오라니엔바움에는 당시 사람들이 썼던 자기와 유리 등이 전시돼 있다. 이는 데사우가 과거 유명한 담배 재배지와 유리 가공업 지역이었다는 역사적 증거다.

 프리드리히 프란츠(1740~1817) 치세 때에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광범위한 조경사업에 들어가면서 데사우뵐리츠 공원은 현재와 같은 틀이 잡혔다. 그는 정원에 당시로는 파격적인 영국식 조경 양식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독일 최초로 영국식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에 따른 뵐리츠 성이 건축됐다.

 영국식 조경양식이 받아들여지면서 오라니엔바움도 영국식으로 바뀌었다. 영국식으로 변모하면서 오라니엔바움에는 독일 유일의 중국식 정원과 탑도 세워졌다.

 데사우뵐리츠 정원에는 당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의 영향력도 찾아볼 수 있다. 대자연의 교육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루소의 이념을 반영하듯 공원에는 담장이 없어 누구나 자유롭게 공원에 들어올 수 있다. 공원 내 루소섬은 루소가 묻힌 에름농빌을 모델로 하고 있다.

 데사우뵐리츠 정원 내 건물들은 워낙 넓게 퍼져 있어 배를 타고 정원을 돌며 곳곳에 놓인 건축물과 동상 등을 둘러보는 것이 편하다. 목초지와 과수원 같은 주변 농지 구역도 정원과 어우러져 자연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성지-바우하우스



▲ 현대 건축의 성지로 불리는 바우하우스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있어 성지와도 같은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뵐리츠 정원에서 6㎞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뵐리츠 정원을 벗어난 뒤 거리에 나타나는 건물들을 보면 건축이나 디자인에 문외한이라도 단번에 주변 지역 건물들과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 건물들이 과거의 모습이라면 데사우 지역의 건물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과 완전히 같은 형태로 지어져 있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데사우에 뿌리내린 바우하우스가 얼마나 현대 건축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방증한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가 건축을 주축으로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바이마르에 세운 학교였다. 이후 불황과 정치적 혼란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한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해 자리를 잡게 된다.

 학생들에게 토목과 금속, 벽화, 인쇄 등 각종 공예 기술을 가르친 뒤 모든 것을 통합한 건축 과정을 가르치는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에서 혁명을 이뤄냈다. 1926년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빌딩에서 만나는 평평한 지붕, 시멘트가 고스란히 드러난 건물, 크고 평평한 창문, 건물 중간에 자리 잡은 넓은 계단 등은 현대 건축 디자인의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시멘트로 골격을 다진 건물은 바우하우스 빌딩이 세계 최초였다.

 건축뿐 아니라 금속과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와 테이블, 금속과 천으로 만든 의자, 반듯한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 등 요즘 봐도 세련돼 보이는 가구들도 바우하우스에서 탄생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폐쇄된 점을 감안하면 바우하우스가 그 짧은 기간에 건축과 디자인에 미친 영향은 위대할 정도다.

 바우하우스를 안내한 가이드에 따르면 1920년대 너무 파격적이었던 금속과 천만으로 만든 의자를 판매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당시 바닥에 놓고 기울여 한 손으로 고정시킨 뒤 회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단단하지만 놀랄 정도로 가볍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파격적 디자인 때문에 판매에 애를 먹었던 의자가 이제는 3000유로(약 387만 원)에 팔릴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데사우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바우하우스 빌딩뿐 아니라 바우하우스 교수들의 사택(마스터스 하우스)과 고용 센터, 콘 하우스 레스토랑 등 바우하우스 디자인 이념이 담긴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바우하우스 빌딩과 마스터스 하우스 등은 1996년에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바우하우스 빌딩에서는 과거 학생들이 썼던 기숙사를 관람하는 기회뿐 아니라 숙박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동 사용이라는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싱글룸은 요일에 따라 하루 35~40유로, 리모델링 싱글룸은 45~50유로, 더블룸은 55~60유로다.

 

 

#분단의 역사가 자연으로 남다-그뤼네스반트


 독일이 통일된 지 26년이 됐지만 그 분단의 흔적은 고스란히 독일 국토 안에 남아있다. 녹색 띠라는 뜻의 ‘그뤼네스반트’는 영어로 하면 그린벨트다. 하지만 도시 주변 녹지 공간을 보존하기 위한 그린벨트와는 관련이 없다. 그뤼네스반트는 동독이 서독과의 접경 지역에 높이 3m 철조망과 너비 2㎞의 지뢰밭 등을 설치했던 분단선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이다. 철조망을 놓으며 깔았던 콘크리트가 독일 국토를 가로지르며 남아있다. 콘크리트 구멍 사이 사이에 솟아난 풀을 보고 있자면 분단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독일 분단선의 길이는 1400㎞로 우리나라 휴전선 길이인 250㎞보다 길다. 과거 동독 지역이었던 작센안할트와 서독 지역이었던 니더작센의 경계선에 그뤼네스반트가 있다.

 40여 년간 이어진 분단에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 주변 환경은 인간의 침입이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 덕에 수많은 멸종 위기 동물이 경계선 주변에서 살아남았다. 통일이 되자 독일 정부와 환경 단체들은 이 경계선을 그뤼네스반트로 만들기로 하고,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그뤼네스반트가 유럽 역사에 가진 의미를 기리기 위해 역사적 기념물로 다루는 등 유럽 최대 환경 보존 지역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보호되는 그뤼네스반트의 길이는 1250㎞나 된다. 그뤼네스반트는 엘베강 생물권 보존지역, 하르츠 국립공원, 뢴 생물권 보존지역 등 150여 개 보호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생태 네트워크로 기능하고 있다.

 이 그뤼네스반트에 남아있는 콘크리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높이 솟아있는 감시탑과 곳곳에 놓여 있는 철조망을 만날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철조망 너머로 볼 때 느끼는 아련함은 분단을 겪고 있는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성일 것이다.


도시간 이동 기치가 편해, 바우히우스 숙박 '이색적'

 

 

여행팁

 

 

 

 마그데부르크와 크베들린부르크, 비텐베르크, 데사우 등 작센안할트주의 주요 도시들을 여행하려면 주도인 마그데부르크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편하다. 마그데부르크로까지는 베를린을 통해 독일로 들어간 뒤 기차를 이용하는 편이 쉽다. 다만 한국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 프랑크푸르트나 암스테르담 등을 경유해야 한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마그데부르크 중앙역까지 가는 기차는 30분 혹은 1시간마다 1대씩 있다. 독일의 기차 운행 정보는 독일 철도청 홈페이지(www.bahn.de)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그데부르크에서 크베들린부르크나 비텐베르크, 데사우 등은 기차를 이용하자. 1시간 내외면 마그데부르크에서 각 도시로 갈 수 있다. 크베들린부르크나 비텐베르크 모두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여서 넉넉잡아도 3~4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다만 데사우는 바우하우스 관련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고, 데사우뵐리츠 정원도 커서 하루 안에 돌아보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데사우 지역 호텔에 묵으면서 하루는 바우하우스 건물들을, 하루는 데사우뵐리츠 정원을 돌아보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이 기회에 바우하우스 빌딩에 하루 묵으면서 시간을 여유롭게 갖는 것도 좋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건축과 디자인 성지에서 잠을 자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바우하우스 숙박은 이메일(unterkunft@bauhaus-dessau.de)이나 전화(49-340-6508-318)로 문의하면 된다.

 

독일관광청 홈페이지(www.germany-tourism.de)를 통해 각 지역에 대한 자세한 여행 정보를 한국어로 얻을 수 있다. 독일관광청 한국사무소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02-2773-6430


작센안할트=글·사진 김석 기자


<출처> 2016년 5월 4일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