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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강원 정선 '삼탄아트마인', 막장 속 고단한 삶의 흔적… 예술로 ‘환생’하다

by 혜강(惠江) 2013. 6. 1.

 

강원 정선 미술관 '삼탄아트마인’

막장 속 고단한 삶의 흔적… 예술로 ‘환생’하다

 

 

영월·정선·태백 = 글·사진 박경일 기자

 

 

 

▲ 강원 정선의 폐광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조차장은 수직갱도와 레일, 석탄차 등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탄광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폐광된 광산이 미술관 ‘삼탄아트마인’으로 재탄생하면서 쇠락해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조차장에 ‘레일바이뮤지엄’으로 이름 붙였다. 산업 시대의 추억이 쇠락해가는 모습을 그대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삼은 셈이다.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끝내 마지막 숨이 끊어져버린 거대한 검은 짐승. 강원 영월과 정선, 태백 일대에 폐허처럼 남아 있던 폐광된 탄광의 느낌이 꼭 그랬습니다. 멈춘 탄차와 높이 솟은 수직갱, 녹슬어가는 기계, 깨진 유리창….

 

탄더미 가득한 비탈에 판잣집 관사와 루핑집에서 힘겹고 고단한 노동으로, 또 뜨거운 공동체로 살아가던 탄광촌 마을 사람들은 이제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광업소의 자취는 유물처럼 남아 온몸을 던져서 살아야만 했던, 그래서 고통스러웠고 한편으로 아름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거기에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줄여서 ‘삼탄’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지요. 한때 3000여 명의 탄부들이 24시간 탄을 캐내던 거대한 광산입니다. 녹슬어 가던 삼탄이 문 닫은 지 10년여 만인 지난 주말 미술관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이름하여 ‘삼탄 아트마인’입니다. 미술관은 탄광의 흔적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 깃든 광부들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예술을 들였습니다. 폐탄광이 미술관이라니, 당치도 않은 듯하지만 고철이 된 장비와 깨진 유리창, 녹슨 레일의 쓸쓸한 흔적은 그것만으로도 흘륭한 오브제였습니다.

추억과 상처. 버려짐과 쓸쓸함. 고한, 사북, 영월의 폐탄광에서 만나는 건 이런 종류의 뭉클하고도
독특한 미감이었습니다. 여기다가 40년째 펄펄 끓는 국밥을 말아내고 있는 식당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남은 진공의 공간처럼 적요한 마을에서 흥청거리던 탄광촌 전성기의 추억담을 더해서 현재 진행형의 탄광촌 풍경으로 이어보았습니다. 그곳으로 떠나는 여정은 정지한 시간을 찾아가는 길에 다름 아닙니다. 가난과 누추가 진흙처럼 신발에 달라붙던 시절, 어디 꼭 탄광뿐이겠습니까. 되돌아보면 그때는 사는 일이 곧 전쟁과도 같았지요. 시간의 태엽을 감아 낡은 앨범 속의 오래된 흑백사진 속 풍경을 들춰보는 일. 왜 누구나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 녹슬어가는 폐광이 감동의 예술이 되다

강원 정선의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자리에 개관한 미술관 삼탄아트마인. 거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탄광의 중심 시설이었던 쇠락한 조차장이었다. 조차장이란 수직갱, 레일, 석탄차(광차), 컨베이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채탄 현장. 광부들은 여기서 육중한 철탑에 설치한 도르래(권양기) 줄을 타고서 하루 400여 명씩 지하 600m까지 내려가 탄을 캤고, 이렇게 캐낸 석탄 을 끌어올려져 석탄차에 실려 운반됐다. 탄광의 조차장이야말로 한마디로 탄광의 심장이나 다름
없는 공간이었다.

삼탄 조차장의 미적 가치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것만으로 획득된다. 산업시대 유적으로
서의 의미도, 쇠락한 거대함의 미감도 그냥 그대로 둠으로써 얻어진 것들이다. 온통 검은 탄가루에 인차(광부가 타던 객차)와 광차(석탄을 싣던 차)는 폐광 당시 멈췄던 그 자리에 서 있고, 바닥에 뒹구는 갖가지 공구나 헬멧까지도 폐광 당시 그대로다. 거대한 수직갱의 철 구조물과 강철로프, 녹슬어가는 레일과 움직이지 않는 컨베이어…. 탄더미 아래 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우고, 건물 외벽의 높은 창에서 탄더미의 깊은 어둠으로 햇볕이 선명한 사선을 그으며 쏟아지니 이건 숫제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에 다름 아니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이 공간에 ‘레일바이 뮤지엄’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술관 외부에는 지하갱도로 자재를 운반하는 거대한 도르래와 지하채굴 지역에 맑은 공기를
공급하던 수직갱 시설도 있다. 앞으로 생태체험관이나 탄광체험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라는데 지금은 깨진 유리창과 허물어진 외벽으로 초라하게 방치돼 있다. 그러나 미술관의 울타리 안에 있어서일까. 이런 모습도 흉물이라기보다는 독특한 미감이 선사하는 설치예술처럼 받아들여진다.


▲ 강원 정선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자리에 들어선 사북석탄 유물보존관 뒤편에서 벌겋게 녹슬어가는 석탄차

 

▲ 태백 철암동의 쇠락한 건물들. 천변에 시멘트 기둥을 박아 세운 이른바 ‘까치다리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폐광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시각적 쾌감만을 추구하는 미술품과는 아예 격이 다르다. 헤드
랜턴 하나에 의지해 지하의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 탄을 캐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감동이 거기 있다. 쇠락한 폐광의 공간은 탄먼지로 어둡고 칙칙하지만, 한때 거기서 일했던 광부들의 단단한 근육과 삶은 어둠 속에서도 작게 반짝거렸을 것이었다. 캐낸 석탄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성과급의 고된 노동과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낙반사고와 매몰사고에 대한 두려움, 가장의 안위를 바라는 가족들의 근심, 동료와 가족을 잃은 자들의 탄식이 거기 깃들어 있다. 생계를 위해 탄광의 막장까지 흘러들어온 광부들은 ‘딱 3년만’이란 다짐 속에서 작은 희망으로, 때로는 무거운 체념으로 이 깊은 수직갱 속의 어둠을 드나들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뒤에도 대부분이 탄광을 떠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 막장 속의 고된 과거가 미술이 되다

삼탄아트마인은 폐광의 기억과 예술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아트
센터로 활용하는 광업소 본관에는 광부들이 사용하던 목욕탕이 있다. 갑·을·병방의 3개 조가 8시간마다 교대할 때면 일을 끝낸 광부들은 다들 안도 속에서 여기서 몸을 씻었다. 폐광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하면서 목욕탕의 널찍한 공간에 미술가들이 수백 장의 엑스레이 사진을 둥글게 말아 늘어뜨려놓았다. 거기에 진폐증 진단서와 가불통지서, 사망진단서 등을 붙였다. 가공되지 않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낸 일종의 설치미술인 셈이다. 그 앞에서 느껴지는 건 생계와 바꾼 서늘한 공포, 그리고 막다른 골목, 체념…, 뭐 이런 것들이다. 막장의 삶에 대한 ‘막연한’ 애잔함이, 여기서는 당시의 광부들이 맞닥뜨렸을 ‘구체적인’ 두려움과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본관의 2층 실내공간에는 철제 책꽂이를 놓아두고 1963년 채탄이 시작되던 때부터 2001년 폐
광 때까지의 월급 지급 명세서, 이력서, 사고기록, 소송 관계철 등 광업소의 서류들을 쌓아두었다. 이게 그대로 ‘문화유산’이란 제목의 설치미술작품이다. 관람객들은 누구나 마음껏 서류를 꺼내 당시를 들춰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밖에도 광부들의 석탄 묻은 작업복을 빨던 세탁실의
대형 세탁기에는 옷을 둘둘 만 사람의 형상이 빠져 허공을 딛고 날아가는 모습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삼탄아트마인에서 또 눈길을 끄는 의외의 장소가 광업소의 공장동에 들여놓은 레스토랑이다. 공
장동은 탄광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기계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던 곳. 내부를 레스토랑으로 개조하고 거대한 선반이나 낡은 기계 장비 등을 와인 진열대나 조형물로 활용해 빈티지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도시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이다. 여기서는 관람객들을 위해 와인을 곁들인 정찬코스를 비롯해 피자 등을 내놓는다.

삼탄아트마인은 개관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석탄을 캐던 두 곳의 수평갱를 와
인 저장고로 활용하거나 갱도체험 공간으로 개조한다. 광원들의 몸을 데워주던 보일러실은 ‘붉은 벽돌극장’으로 탈바꿈해 연극이나 뮤지컬, 영화 등을 상영하는 소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또 전기실은 작가와 함께 공방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장으로 활용될 예정이고, 미술관 마당에는 1974년 해발 900m에 입구가 있는 갱도에 물이 터져 작업자 전원이 희생됐던 사고를 추억하는 ‘기억의 정원’이 조성된다. 삼탄아트마인은 입장료를 받을 예정인데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성인기준 입장료가 1만3000원 정도로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관을 기념해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입장료를 받지 않을 계획이라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

 

 

# 사북항쟁, 그 깊은 상처를 만나다

삼탄아트마인 말고도, 한때 내로라하는 거대 탄광들에서는 역사와 추억을 보전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그중 한 곳이 하이원리조트 지역사업팀이 운영하는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사북광업소 내의 사북석탄유물보존관이다. 삼탄아트마인이 문 닫은 탄광을 미술의 힘을 빌려 생명력을 부여하려 한다면, 사북광업소는 손대지 않은 유물 그 자체로서의 보전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었던 사북광업소 건물은 폐광 직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물은 석탄유물보존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여기에 폐광 직후 고철폐기물로 흔적 없이 사라질 뻔했던 사북광업소 시절의 유물 1600여 종, 2만여 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시실에는 광부들이 매일 작업복을 지급받을 때마다 내던 옷표부터 탄을 캘 때 쓰던 각종 장비, 매몰 사고 때 쓰던 각종 구조장치를 비롯해 당시에 광산에서 사용하던 수많은 물품들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광부들의 양은 도시락에서부터 채탄을 하던 거대한 착암기까지 당시 광산에서 쓰이던 물품이라면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심지어 설 명절에 역대 대통령들이 사북탄광의 광부들에게 지급한 겨울 외투며, 박근혜 대통령이 1978년에 써준 글씨, 폐광과 함께 멈춰버린 시계까지도 전시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사북석탄유물보존관에 전시된 광부들이 신던 투박한 신발. 보존관에는 광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석탄을 캐기 위해 갱도로 들어가는 광부들이 타던 인차의 조종간. 전기를 넣으면 금세 움직일 것 같다.

 

                        ▲ 폐광 광산에서는 관광객을 태우고 서늘한 탄광의 갱도로 들어가는 광부 체험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이른바 ‘사북항쟁’의 기록들이다. 1980년 4월 사 측과 결탁한 노조의 임금협상 전횡에 광부들은 극렬한 저항으로 사 측에 맞섰다. 매년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정도의 위험한 작업환경과 탄광회사의 비인간적인 착취에 맞선 광부들의 노동항쟁이었지만 당시에는 소위 불순분자들이 개입한 난동으로 간주됐다. 사북의 광부들은 폭도로 매도됐으며 노사 합의 이후에도 극심한 지역사회의 갈등으로 번져나갔다. 전시된 방대한 기록과 유물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겠다면 짧아도 반나절 이상은 잡아야 한다.

  유물보존관에서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중 인기 있는 것이 입갱체험이다.
입갱체험이란 광부들이 타던 인차를 타고 레일을 따라 광업소 내 두 곳의 갱도를 직접 들어가보는 체험이다. 갱도 속은 한여름에도 소름이 돋다 못해 추울 정도다. 관광객들은 갱도에서 200m 남짓까지 들어갔다가 금세 나오지만 그 안쪽으로 갱도가 6㎞가 넘게 이어져 있다. 광산 시절 광부들은 이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들어가 빛 한 줌 들지 않는 공간에서 석탄을 캐냈다.

  석탄유물보존관 인근에는 탄광촌 복지마을을 리모델링한 ‘뿌리관’이 있다. 석탄산업의 태동부터
번영기, 그리고 폐광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전시공간이다. 여기에는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에 따른 잇단 폐광 이후,  광부들의 생존권 투쟁과 정부와의 협상 등의 기록들이 상세하게 전시돼 있다. 내친김에 수도권에서 삼탄아트마인이나 석탄유물보존관으로 가는 길에 거치게 되는 강원 영월의 마차리 석탄문화관도 함께 들러보자. 이곳은 당시 광부들의 생활모습을 영화세트장처럼 만들어놓은 곳이다. 세트장 나무 전봇대에 붙여진 당시의 표어가 이랬다. ‘일하고, 또 일하고, 더 일해서 번영찾자’ 어디 광부들만 그랬을까. 당시에는 ‘그냥’ 일하는 것으로는 부족했
고, 누구든 ‘또’‘더’ 일해야 했다.



# 통리 장날, 그리고 서늘한 철암 시장풍경


 

  정선과 태백 일대에는 현재 진행형의 ‘날것’ 같은 탄광촌 풍경도 여지껏 남아 있다. 탄광이 잘 돌아가던 시절, 정선과 태백 일대는 광산에서 풀린 돈으로 흥청거렸다. 고된 일을 마친 광부들이 돼지고기 몇 점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대폿집들로 불야성을 이뤘고 니나노 가락의 이른바 ‘색시집’들도 곳곳에 들어섰다. 통리와 철암에 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특히 탄광의 월급날 직후에 서는 장날에는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장을 보러 나온 이들의 호주머니를 몰래 뒤지는 ‘쓰리꾼’들도 전국에서 원정을 와서 활개를 칠 정도였다. 이제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한, 탄광이 문을 닫기 전의 일이다.

  전성기 때보다는 못하지만 아직 이런 흥청거림이 남아 있는 곳이 태백시 통동에 서는 ‘통리장’이다. 통리장은 동해의 북평장에 이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큰 장이다. 전통시장은 보통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이 보통인데 통리장은 열흘 간격으로 매달 5일과 15일, 25일에 서는 십일장이다. 애초에 탄광이 번성하던 시절 여기서 멀지 않은  철암동에도 적지 않은 상권이 형성되면서 철암장이 10일과 20일, 30일에 섰다. 오일장이 통리와 철암에서 번갈아가며 섰던 셈이다. 

 

 

 

  탄광촌은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데 왜 통리장의 위세는 아직도 당당한 것일까. 그건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강원 삼척과 태백, 정선, 그리고 경북 봉화의 물산들이 여기서 교환된다. 통리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산나물이 고작이니 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은 죄다 외지에서 온 것들이다. 대한광업 한보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소비를 지탱하는 주민들의 수도 급격하게 줄어 들었으니 그 물건을 사는 이들도 외지이다. 작은 마을 전체가 다 시장 바닥이 되는 통리장날에는 그래도 장터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통리장이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면, 철암역 부근의 철암장은 쇠락할 대로 쇠락했다. 천변을 따라 시멘트 기둥을 박아 세운 일명 ‘까치다리’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철암은 쇠퇴하고 음울한 탄광촌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을 닫아 폐허가 된 도로변 건물의 간판은 얼마나 오래됐던지 네 자릿수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젊은이의 양지, 동궁다방, 경북상회….

 

 

               
  장이 서지 않는 날의 철암시장은 텅 빈 공간이 적막하다 못해 무섬증마저 느껴질 정도다. 좌판을 깔고 오이며 나물 따위의 푸성귀를 늘어놓은 할머니 둘이 손님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빈 시장에서 옛 추억이나 두런두런 나누고 있을 뿐이다.

  도무지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곳은 곧 광산역사체험촌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태백시가 11동의 까치발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를 박물관이나 설치예술품이 전시되는 아트하우스로 개조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곳은 말끔하게 단장되기 전에 찾아가보는 편이 더 낫겠다. 한때는 치열했던 삶의 기운으로 시대의 속도에 저 멀리 뒤처지고 만 탄광촌의 쇠락하고 쓸쓸함을 거기서 날것 그대로 생생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출처> 2013. 5. 2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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