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 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 신은숙 / 1970년 강원 양양 출생. 강원대 국문과 졸업.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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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한 상상력·미학적 논리 통해 세계 재해석
예심을 거쳐 올라온 스물여섯 분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의한 끝에 두 심사위원은 이의 없이 신은숙의 ‘히말라야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구조적 완결성과 언어적 진솔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한 특별한 사물의 인식에서 촉발된 신선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의 미학적 논리를 통해 이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계란 하나의 큰 학교이며 삶은 그곳에서 이수해야 하는 일종의 학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학습은 학교 운동장 한 켠에 말 없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히말라야시다’의 존재론적 의미와 같은 것이 되지 않고서는 일상성을 탈피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 생의 진정한 완성이란 히말라야시다의 나뭇가지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되새 떼의 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당선작이 요즘 우리는 간과하고 있으나 시가 지향해야 될 이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신선하게 형상화하려 노력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상상력에 대한 믿음, 언어적 소통에 대한 가치 부여, 미학성과 철학성의 적절한 조화 등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 시단이 소통 부재의 언어유희나 정신분열적 사유의 독백 같은 시들로 오염되고 있어 더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작품 과반수도 이 같은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씁쓸했다.
마지막까지 논의되다가 탈락한 작품으로 이시언의 ‘유리창의 파리’는 형상성이나 시상 전개에서 재능을 보여줬으나 상상력이 단순하고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약했다. 구한의 ‘노인목경건조공법’은 묘사력과 수사가 탁월하고 언어의 밀도도 나무랄 데 없으나 시상의 비약이 심했고 대상을 단지 묘사해 보여주는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게 흠이었다.
_ 오세영,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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