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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모든 것 : 200여년전 ‘순교의 기억’, 돌십자가는 기억한다

by 혜강(惠江) 2012. 6. 29.

 

                                  전주의 모든 것

 

          200여년전 ‘순교의 기억’, 돌십자가는 기억한다

 

                                                전주 = 글·사진 박경일기자

 

 

                     

 

 

 

하늘과 맞닿은 ‘치명자산’

 

  전주라면 한옥마을만 떠올리는 이들에겐 다소 낯설지만 전주는 ‘가톨릭의 성지’다. 우리 땅에 가톨릭이 전해진 뒤 첫 순교가 전주에서 있었다. 때는 1791년. 정약용의 권유로 가톨릭 신도가 된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한다. 윤지충은 외사촌 권상연과 장례 절차를 논의한 끝에 교회의 가르침대로 유교식 제례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성심성의껏 예의를 갖췄지만 제사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지 않았던 것. 이게 와전돼 급기야 ‘조문도 안 받고 시체를 버렸다’는 말로 비약된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단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비도 임금도 없는 패륜이었고, 심지어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아 형벌로도 다스릴 수 없는 흉악범 중의 흉악범으로 단정됐다. 그 결과는 참수형. 그해 12월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가 이뤄졌고, 그게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였다. 그 자리에 100여 년이 지난 뒤 들어선 게 바로 한옥마을의 전동성당이다.

  전주 땅에서의 순교는 끊이질 않았다. 완주의 거부였던 유항검의 일족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멸족을 당한다. 본인은 물론이고 처와 큰아들 내외, 둘째 아들, 제수, 조카 등 일곱이 잡혀가 전주 남문 밖과 전주천 일대에서 끔찍하게 살육됐다. 그 이후로도 박해는 계속됐다. 옛 해성중·고교 자리에서는 참수형이, 전북 경찰청 뒤쪽의 전주옥 자리에서는 교수형과 아사의 형벌이, 서천교 일대에서는 매를 때려 죽이는 장폐가, 전주천변의 초록바위에서는 수장이 이뤄졌다. 가매장됐던 유항검 일족의 시신은 전동성당의 완공과 함께 신도들에 의해 전주 일대를 내려다보는 승암산의 산정에 옮겨져 합장됐다. 그 뒤부터 산의 이름이 아예 ‘치명자산(致命者山)’으로 바꿔 불려졌다. ‘치명자(致命者)’란 순교자를 이르는 말이다.

  치명자산은 해발 360m 남짓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정의 바위는 제법 기골이 장대하다.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치명자산은 꼭 들러볼 만하다. 십자가가 놓인 잘 가꿔진 숲길을 따라 오르면 숨은 가빠지지만 마음은 더없이 차분해진다. 산정 어깨쯤의 비탈면에는 돌을 쌓아 지은 자그마한 성당도 있다. 위로 솟아 짓지 않고 소박하게 비탈면의 지하 쪽으로 들여놓은 자그마한 성당은 온통 경건함으로 넘친다. 성당 위쪽에는 유항검 일가의 묘가 있고 그 뒤의 바위에는 돌로 만든 십자가(사진)가 세워져 있다. 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날 선 바위에 오르면 전주시내의 전경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이쪽 바위 능선은 전주를 내려다보는 가히 최고의 조망대라 할 만하다.

 

속살거리는 전통 골목… 걸음마저 맛있다

全州五樂


 

▲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최초의 순교가 이뤄진 자리에 세워진 전동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건물이 한옥마을의 경기전 부속건물 기와지붕과 제법 잘 어우러진다.

 

 

▲  오후 서너 시쯤 전동성당의 내부로 들어가면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볕이 예수의 고난 장면을 새긴 부조에 딱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사진 위는 삼천동 막걸리 골목의 ‘전주큰손막걸리’집에서 1만7000원을 내면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함께 차려지는 기본 상차림. 아래 사진은 놋그릇에 내오는 ‘성미당’의 전주비빔밥.
▲  전주 도심의 ‘영화의 거리’의 밤 풍경. 화려한 거리 조명에, 늘어선 세련된 상점들이 마치 하나의 쾌적한 쇼핑몰을 연상케 한다.
▲  덕진연못의 연꽃은 아직 이르지만, 비가 내리면 온통 수면을 뒤덮은 연잎에 또르르 물방울이 굴러 내리는 정취를 볼 수 있다.

 

 

 

  누대로 ‘완전하고자 했던’ 땅. 이곳은 전주(全州)입니다. 전주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 지금의 ‘온전할 전(全)’자를 쓰는 전주나 과거의 ‘완전할 완(完)’자를 쓰는 완산 둘 다 ‘완전무결’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건 ‘순수하고 티가 없다’는 순결무구를 뜻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어우른다’는 총화융합의 뜻이기도 합니다.

  전주는 몇 안 되는 ‘도시’ 여행지입니다. 사실 현대 도시란 개발에 매진하면서 어느 결엔가 서로 복제하듯 닮아 가고 있습니다. 이 도시나 저 도시나 무엇 하나 다른 것 없이, 그저 발전의 속도 정도만이 차이를 가를 뿐이지요. 그러니 예제없이 비슷비슷한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여행의 열망을 자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주만큼은 예외입니다.

  전주가 다른 도시와 가장 다른 것은 효율이 그려 내는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로 걸음이 늦춰지는 한옥마을의 추녀와 돌담이 그렇고, 푸짐한 인심과 맛깔스러운 먹거리를 내는 도시 뒷골목이 그렇습니다. 도시의 뿌리도 깊고 웅숭깊습니다. 전주에는 끝내 사그라지고 만 후백제의 꿈도, 조선을 건국
한 전주 이씨의 왕업을 이어 온 무게도 품고 있습니다. 그런 전주의 매력을 찾아봤습니다.

  한옥마을 산책에서 시작해 전주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다섯 곳을 꼽아 봤습니다. 이 다섯 곳만으로도 전주의 멋과 맛을 느끼기에 충분할 거라 자신합니다.

 

 

1. 돌담따라 뚜벅뚜벅 ‘한옥마을’

  자유당 때의 일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방 순시를 위해 전라선을 타고 전주를 지나 남원으로 향하던 길. 그때만 해도 전주-남원을 잇는 전라선 철도는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지나 지금 전주시청 자리에 있던 전주역과 오목대, 한벽굴을 거쳐 남원으로 향했다. 교동과 풍남동, 그러니까 지금의 한옥마을 쪽에 바짝 붙어 철로가 지나갔다. 열차를 타고 이 구간을 지나던 이 전 대통령은 번듯한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던 한옥마을을 특히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란 직후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살림은 궁벽했던 시절에 번듯한 기와집들이 늘어선 모습이야말로 이 전 대통령이 꿈꾸던 ‘부의 상징’이었을 터였다.

  대통령이 흡족해 하는 모습을 지켜본 당시 최인기 내무장관의 충성이었는지, 혹은 이 전 대통령의 특별 지시였는지는 모르겠으되 그 뒤부터 전주 교동 일대 한옥마을을 보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전주를 오갈 때마다 팔작지붕이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한옥마을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니 고위층의 서슬 퍼런 엄명은 정권을 이어 가며 줄곧 계속됐을 것이었다. 그러니 전주의 한옥마을은 1977년 처음 ‘한옥보전지구’로 지정되기 이미 오래전부터 보호, 혹은 규제되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은 전통 한옥과는 사뭇 다르다. 한옥마을의 집은 일제강점기 무렵 소위 ‘집 장사’들이 지은 도시형 한옥들이다. 부농 지주들이 너른 제 땅에다 고래등같이 올린 한옥이 아니라, 도시를 찾아든 상업자본이나 지역 토호들이 집 장사에게 짓게 하거나 사들여 거주했던 곳이다. 전주의 한옥마을이 정감 어린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솟을삼문에다 널찍한 정원과 사랑채를 거느린 안동 일대의 양반 고택에서는 고색창연한 전통미나 압도의 감정은 느낄지언정, 추억을 환기하거나 정감이 느껴지진 않는 법. 반면 사방을 담으로 둘러친 전주 한옥마을의 도시형 한옥은 비록 풍류는 모자라지만 금세 평안해지고, 오래 묵었던 추억이 되살려진다.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산책이 즐거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전주 한옥마을을 찾았다면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경기전과 한옥마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오목대야 꼭 들러야 하는 곳이지만, 이 두 곳을 뺀다면 구태여 동선을 따로 정할 것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기웃거리며 다니는 게 맞춤하다. 골목에는 화강석을 정갈하게 다듬어 물길을 놓기도 했고, 꽃문양을 그려 정성껏 쌓은 돌담도 있다. 숙박객을 받는 운치 있는 툇마루의 한옥도 있고, 한지나 전통 염색 등 갖가지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한옥마을에서는 동선도 자유롭지만 보내는 시간 또한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한옥마을을 휘 돌아보자면 1시간이면 족하지만, 이것저것 체험을 즐기며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한나절로도 모자란다.

  한옥마을에 ‘전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마을 복판에 통창을 낸 양옥건물의 카페가 들어서고, 한옥집이 피자와 파스타 따위를 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변신한 곳도 있다. 심지어 스시를 파는 일식집도 한옥마을 가운데 번듯하게 자리 잡고 간판을 내걸었다. 서양식 레스토랑이나 진한 아메리카노를 내는 카페, 혹은 왜색의 스시집들이 한옥의 풍광이나 정서를 해친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거야 보기 나름이다. 사실 전주 한옥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민속촌과 같은 ‘박제의 공간’이 아닌 실제로 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이었기 때문. 보존을 위해 예산을 쏟아부어야 하는 적막한 한옥촌이 아니라, 아무런 지원 없이도 한옥들이 저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카페나 이탈리안 레스토랑, 스시집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런 색다른 분위기의 카페나 레스토랑이 젊은이들을 한옥마을로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한옥마을이 생존할 수 있는 조건과 방식은 딱 이만큼이라도 좋을 듯하다.

2. 밥상의 무한변주 ‘막걸리골목’

 
전주에 왔다면 풍성한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는 일. 뭐니 뭐니 해도 전주 먹거리의 맨 앞에는 비빔밥이 있다. 정통 전주 비빔밥의 재료는 청포묵에 호두, 밤채, 은행, 접장, 육회볶음까지 줄잡아 서른 가지가 넘는다. 재료도 재료지만 밥을 짓는 방식부터가 다르다. 닭 삶은 물과 소 등심살 삶은 물을 섞어 법을 안치고 솔가지나 솔방울로 불을 때 꼬두밥을 지은 뒤 소쿠리에 담은 뒤 식혀 맑은 물로 적신 행주를 덮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게 한다.

 

  지금이야 이렇게 짓는 비빔밥은 없어졌고, 식당마다 형편대로 비빔밥을 내지만 그 맛만큼은 여전하다. 전주비빔밥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이름난 식당들은 대개 따라 내는 반찬만 10가지가 넘는다. 비빔밥 한 그릇에 1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라 좀 비싼 듯하다 싶지만, 놋그릇에 화려하게 차려 낸 비빔밥의 깔끔한 담음새와 딸려 내는 반찬을 앞에 두면 입맛이 절로 돈다.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비빔밥집으로는 고궁(063-251-3212)과 성미당(063-284-6595)이 꼽힌다. 가족회관(063-284-0982), 갑기회관(063-211-5999) 등도 못지않다. 서로 맛이 좀 다르긴 하지만, 사람마다 선호하는 집이 엇갈리니 우열보다는 취향에 따른 것이겠다. 근래에 전주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마솥에 지어 내는 돌솥밥이 비빔밥의 인기를 넘보고 있다. 돌솥밥집 중에서는 반야돌솥밥(063-288-3174)을 첫손으로 꼽는다.

  전주의 콩나물국밥도 이름났다. 전주 콩나물국밥은 임실에서 나는 쥐눈이콩(서목태)으로 기른 콩나물을 썼는데 봄에는 하루 세 번, 여름에는 네 번, 가을에는 두 번, 겨울에는 한 번 물을 주고 키워 낸 콩나물을 재료로 사용했다.

  전주에는 막걸리 골목도 유명하다. 전주는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데다 물이 좋고 술도가에 누룩을 공급하는 전북곡자회사가 자리 잡고 있어 막거리 맛이 좋기로 이름났다. 막걸리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지금 전주의 막걸리골목은 술맛이 아닌 푸짐한 안주 때문에 유명하다. 막걸리 3통이 들어가는 한 주전자(1만7000원)를 주문하면 줄잡아 열댓 가지가 넘는 안주가 공짜로 차려진다. 스무 가지가 넘는 안주를 내는 곳도 있다. 주전자 주문이 늘어날수록 상에 깔리는 안주는 고급스러워지고 푸짐해진다. 전주시내에는 이런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일곱 군데나 된다. 그중 원조라 할 수 있는 곳이 삼천동 우체국 골목 일대. 전주 큰손막걸리(063-236-9787)를 비롯한 40여 곳의 막걸리집이 성업 중인데, 밤이 되면 대폿집마다 불콰해진 손님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3. 夜 ! 좋다… 달콤한 밤마실

  전주 도심 한복판의 밤 풍경은 다른 도시와 사뭇 다르다. 영화관이 몰려 있는 완산구 고사동 일대. 수많은 상가가 밀집해 있는 이곳은 서울로 치자면 명동 격이다.

  하지만 명동처럼 인파에 치이지도 않고, 다른 중소도시의 도심처럼 썰렁하지도 않다. 상점가가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다. 쇼핑을 하기에는 딱 좋은 크기. 그리고 행인들끼리 어깨를 부딪치지 않을, 딱 그만큼만 붐빈다. 저마다 휘황한 조명과 간판, 통유리로 장식한 상가거리는 마치 하나의 테마로 치장한 세련된 쇼핑몰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전주영화제 등을 개최하면서 세워놓은 거리의 조형물들도 화려하게 거리를 밝힌다.

  상점가 한쪽에서는 닭강정을 튀겨 내는 작은 가게 앞에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섰고, 길 쪽으로 테이블을 내놓은 노천 바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물건 값이야 다른 도시와 다를 리 없지만 세련된 상점의 진열장을 넘겨다보면 저절로 쇼핑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고 난 뒤에 가볍게 산책 삼아 도심의 번화가를 기웃거리는 맛이 제법이다.

  최근 전주에서 밤마실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 남문시장 새마을상가 2층의 ‘청년몰’이다. 청년몰은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이른바 ‘문전성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역의 문화단체가 남부시장상인회와 손잡고 문을 연 유쾌한 시장이다. 낡고 허름한 상가에 독특한 콘셉트의 카페와 레스토랑, 옷집 등 12개의 점포를 들였는데, 그 분위기가 참 독특하다. 낯선 디자인의 조합에 기발한 유머가 더해졌다. 애초부터 자리 잡고 있던 터줏대감 격인 보리밥집은 ‘순자씨 밥줘’란 간판을 내걸고 있고, 그 옆의 고양이를 테마로 한 카페에서는 낡은 책상을 테이블로 내놓고 아메리카노를 판다.

  ‘만지면 사야 합니다’란 글귀를 적어 놓은 소품 판매점도 있고, 500원이란 가격표에 ×표를 치고 그 밑에 1000원이라고 적은 가격표를 내건 중고용품점도 있다. 심지어 파리지옥 같은 식충식물들만 파는 점포도 있다.

  점포의 디자인이나 간판만 독특한 게 아니다. 상점을 운영하는 열일곱 명의 젊은 주인들도 개성 넘친다. 저녁이면 문을 여는 칵테일 바의 젊은 사장은 기타를 치다가 무료한지 상점 앞으로 나와 비눗방울을 불고 있고, 카페 주인은 길고양이들 밥을 챙겨주느라 분주하다. 시장 한쪽의 평상에서는 장사를 작파한 상점 주인들은 모여 시원한 맥주 몇 병을 앞에 두고 여름밤을 보내고 있다. 아직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주 중에는 좀 썰렁한 편. 되도록 손님이 많은 주말이나 휴일에 찾아가는 것이 낫겠다. 거기서는 주인과 주인이, 주인과 손님이, 또 손님과 손님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이렇게 서로 어울리다 보면 저절로 유쾌해진다.

4. 연꽃향기 찰랑 ‘덕진연못’

  이즈음 전주를 찾는 외지 사람들은 너나없이 한옥마을부터 들르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주를 대표하는 명소는 덕진공원이었다. 덕진공원이 명물은 단연 연꽃이다. 덕진연못의 연꽃은 예부터 ‘덕진채련(德津採蓮)’이란 이름으로 전주 8경에 이름을 올렸다. 단오에는 연꽃 구경을 나서거나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다.

  관광객의 발길은 죄다 한옥마을로 향하고 있지만 덕진연못의 연꽃은 아직도 성성하다. 성급한 몇 송이만 피어났을 뿐 덕진연못의 연꽃의 만개는 아직 이른 편. 그러나 너른 호수를 온통 뒤덮은 연잎이 연초록에서 초록으로 짙어 가는 모습만으로도 탄성을 터뜨리게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위를 출렁거리며 걷는 맛도 좋고, 후두둑 비라도 뿌릴 양이면 또르르 연잎 위를 구르는 물방울이 운치를 더해 준다.

  덕진연못이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깊다. 옛사람들은 전주 땅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북서쪽이 비어 땅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기운을 가두기 위해 덕진연못을 지었다는 것이다.

  전주는 풍수의 땅이다. 전주의 이름에 쓰인 ‘온전할 전(全)’자나 전주의 옛이름인 완주의 ‘완전할 완(完)’자에서 드러나듯 옛사람들은 전주에 ‘완벽한 땅’을 구현하려 애썼다. 이런 열망은 전주 땅에 정치와 종교가 합일된 이상향을 구현하려던 후백제 견훤에게서 뚜렷하다. 전주에 도읍을 정한 그는 북현무, 남주작,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살폈다. 그때 북현무의 자취가 옛 KBS전주총국 자리에 놓인 길이 17m, 무게 270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북바위다. 북으로는 거북이 물길을 지키고, 남쪽에는 왕궁이 뒀으며, 동쪽은 용이, 서쪽은 기린이 지키는 형국인 셈이다. 견훤은 이처럼 전주를 상상계의 동물이 방위를 지키는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했다. 여기다 네 개의 방위마다 절집을 세우고 이 절의 이름을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라 했다.

  덕진공원은 일제강점기 무렵 친일파이자 호남 갑부였던 박기순이 사설공원을 설치할 목적으로 1917년 30년간 임대하기도 했다. 그가 환갑을 기념해 호숫가에 지은 취향정은 풍류가 넘친다. 연꽃향기로 가득찰 무렵인 단오(24일)에 맞춰 부채 하나 들고 취향정에 올라보면 어떨까.
 

 

전주 어디서 묵을까

 

                            

 

 

  쾌적하고 깔끔한 숙소를 원한다면 한옥마을을 굽어보는 자리의 전주코아리베라호텔(063-232-7000)을 추천한다.
  모처럼 한옥마을로의 여행이라면 전통 한옥에 묵는 것도 좋겠다. 한옥마을의 민박 중에서는 학인당(063-284-9929)과 양사재(063-282-4959), 부용헌(063-284-8587) 등이 인기가 있는 곳.  한옥 민박들은 테마에 따른 체험 프로그램을 두루 갖추고 있어 자신의 취향에 맞춰 숙박을 결정하는 것도 좋겠다.
  국악 감상과 전통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아세헌(062-387-1677), 다도를 경험할 수 있는 풍남헌(063-286-7673), 다도 예절 등을 배울 수 있는 설예원(063-288-4566)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완산구 고사동의 ‘영화의 거리’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전주한성관광호텔(063-288-0014)도 여행 온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숙소다

 

 

<출처> 2012. 6. 2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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