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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모송론(母頌論) / 김진섭

by 혜강(惠江) 2008. 11. 23.

 

                                   모송론(母頌論)

              

                                                                                                김진섭

 

  사람이면 사람이 모두 그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을 누구에게 감사할 이유는 물론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흔히 다른사람이 뿌린 씨를 자시 스스로 거두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괴로운 운명을 슬퍼

하기도 하는 까닭이올시다. 자기의 뜻에는 오로지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왕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온 바에야 구태어 무엇을 슬퍼하리오. 될수록이면 기쁨을 찾음이 보다 현명한 방도가 아닐까요.

                                                                                        
  인생(人生)이 너무나 불행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점만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생(生)을 받은 우리의 찬송(讚頌)은,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첫째 우리들

의 어머니 위에 지향(志向)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려서 이미 어머니를 잃고, 클수록 커지는 동경

(憧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아들의 신세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큰 불행이라면, 어려서

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기고, 커서는 어머니의 덕을 받들어 모자(母子)가 한 가지로 늙는 사람의 팔

자(八字)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큰 행복일 것입니다.

  생각만이라도 해 보십시오. 만일에 어머니라 하는 이 아름답고 친절한 종족(種族)이 없다면, 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나 되어 갈까요? 이 괴로운 세상을 찬란하게까지 장식하고 있는 모든 감정, 가령

말하자면 저 망아적(忘我的) 애정, 저 심각한 자비(慈悲), 저 최대한의 동정(同情), 끝이 없는 긴밀

한 연민(憐憫), 저 절대한 관념(觀念)― 이 모든 것은 이 곳에서 사라져 버리고야 말 터이지요.

  그리하여 이 때, 이 세상이 돌연히 한 없이도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고달파질 터이지요. 참으로

어머니와 아들의 결합과 같이 힘차며, 순수하며, 또 신비로운 결합은 어떠한 인간 관계 속에서도 찾

아 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향(故鄕)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새로 생긴 자에 대해
그에게 영양(營養)을 제공하고,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어머니야말로 참된 향토(鄕土)가 아닐까요?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성장하여 가는 아동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영원히 그들의 괴로워할 때의 좋은

피난소(避難所)이며, 그들의 즐거워할 때의 좋은 동감자(同感者)입니다.

  어린아이가 어찌하여야 할 바를 모를 때, 그는 반드시 어머니를 향해 웁니다. 아프고 괴로워 위안

이 필요할 때, 그는 바삐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갑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신뢰는 참으로 한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도움이 있을 것을, 어머니에게는 귀의심(歸依心)이 있고 이해력이 있는 것

을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어머니의 손이 한 번 가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은 가벼웁게

무너지고, 모든 것은 좋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인(成人)의 어머니에게 대한 신빙(信憑)이 이에

못할 수 없겠지요.

  어머니가 생존하여 계시는 동안 우리에게는 고요히 웃는 마음의 고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어두움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머니는 저 하늘에 빛나는 맑은 별과 같이도 순수합니다. 그것이 무에 이상할 것이 있겠

습니까?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어머니 피로부터, 어머니 정신으

로부터, 어머니의 진통으로부터 나온 까닭이올시다. 어머니는 우리의 뿌리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간의 참된 조국(祖國)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자기 나라말을 가르치고 모어(母語)라 부

르는 것은,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도덕과 지식 일반의

최초의 개념, 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지극히도 자극적인 노래와 유희(遊戱)를 처음 배우는 것입

니다.

  사람과 사람의 결합에 있어서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와 같은 그렇게도 긴밀한 인간적 결합은 실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곧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생각할 터이

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집 안에 앉아 계시기보다는 집 밖에 많이 나가 계십니다. 아버지라는 이들

은 흔히 어머니 가까이 있어 한 가지 아이를 애무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몸입니다. 그는 가정 밖에

직업을 가지고 있고, 또 밖에 나서서 사업을 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이에게

사랑할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경할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암만 친절한 아버지라도 아이들

은 거의 예민한 식별력(識別力)으로 아버지를 어머니같이 만만하게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은 말하자면, 어머니가 '친밀(親密)의 원리'를 가지고 항상 아이들을 양육하는 입장에 서 있는 데
대해서, 아버지는 '엄격(嚴格)의 원리'에 사는 하나의 교훈적 존재인 까닭이겠지요.

  커 가는 아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떨어져 자기의 길을 자기 홀로 걸어가려 할 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이 때, 반드시 퍽이나 괴로운 시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의 디디는 발은

처음엔 위태로워 보이지마는, 그러나 나중에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일정한 목적을 향하여 용감

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든지 아들이란 그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

어도 결국 어린아이로서밖에는 비치지 않는 까닭으로, 어머니는 이 때 적지 않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없이는 한시를 살 수 없는 것 같은 아이가, 이제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무용(無用)의 장물(長物)로서까지 여김을 받을 때, 즉 이제까지는 말하자면 어머니

의 일부분이던 아이가 나중에는 어머니를 완전히 떨어져 자기 혼자서 생활을 꾀할 때, 어머니 되는

사람의 근심과 슬픔은 비할 곳 없이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나이 젊은 아들이 택할 길

과, 어머니가 그네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꿈꾸고 있는 길이 전혀 다를 때, 어머니의 실망이

일시에 커져갈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 모자간(母子間)에 서로 다리를 걸 수 없는 한 개의 큰 분열을 생기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두터운 소원(疏遠)이 일
나고야 마는 수도, 물론 이 넓은 세상에는 드물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이겠지요. 어머니는 자기와 그리고 자기

견해에 아들을 복종시키려고 만반의 책을 강구하여 봅니다. 그러나 대개 이 방법은 수포로 돌아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때, 어머니는 고적(孤寂)을 느끼고, 냉대(冷待)를 느끼고, 모욕(侮辱)

느낄 터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성장의 시기에 있는 아이들이란 은덕(恩德)을 알지 못하

까닭입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길만 이기적(利己的)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어찌 나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기주의

(利己主義)는 모든 새로운 시대가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이상(理想)을 가지는 데 유래(由來)하여

있는 까닭이올시다. 즉 하나의 새로운 시대에 속하고 있는 이 젊은이들은, 청년의 의기(義氣)를
가지고 그들 자신의 이상을 실시하려 함에 문제는 그치는 것입니다.

  시대와 시대 사이에는 항상 격렬한 투쟁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를 때마다

싸움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들은 이리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철두철미 물리치고 드디어 이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인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들의 반항은 크고, 아들의

태도는 적의를 품은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마를 밟는 것이지마는, 커서는

어머니의 가슴 속을 박차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현명한 아들들의 큰 비애에 틀림없습니다만

애정과 정의와는 스스로 별자인 것을 사람은 인정하여야 되겠지요.

  그러나 아들의 발에 아무리 짓밟힌 어머니도, 어머니는 결코 그네들의 아들을 버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이른바 인생의 황야를 잘못 방황하고 있는 많은 사람의 무리가 있습니다. 어

떠한 자는 악한(惡漢)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도적(盜賊)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모반(謀反)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범인(犯人)이 되고, 어떠한 자는 살인수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 때, 이렇게까지 된 아들에 대한 어머니 심중(心中)은 어떻겠습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이 범죄자를 벌써 용서하여 주지 않을 때라도 어머니만은 그를 용서하여 주는 것입니

다.

  모든 사람으 마음 속 깊이는, 설사 그가 퍽은 흉맹(凶猛)한 자라 할지라도, 어머니에 대한 신앙

(信仰)만은 끊어짐이 없이 존속되어 있습니다. 저 어머의 사랑에 대한 신앙, 저 어머니의 한도 없

연민에 대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신앙이 말이지요

  보십시오. 가령, 교살(絞殺) 대상의 사형수는 그의 목 위로 도끼가 떨어지기 직전에 과연 누구를

찾아 부르짖습니까? 물론 그것은 어머니올시다. 보십시오. 가령, 전지에 죽어 넘어지는 청년은

구원(救援)을 비는 최후의 비장한 규환(叫喚)을 누구에게 향하여 발하는 겁니까?물론, 그것은 어

머니올시다. 최후의 고민과 최후의 절망에 있어서 사람은 될 수록 그들의 낯을 어머니에 향해 돌

리려 합니다. 그들이 어렸을 때에 하던 그 모양으로 말이지요. 어떠한 다른 수단으로 서는 벌써

구제할 수 없는 경우에라도, 어머니는 일개 신성(神性)의 자격을 가지고, 오히려 또한 아들의 최후

를 건지는 수가 있는 까닭이올시다. 운명의 손에 이미 버림을 받은 몸이지만, 아들에 대한 천명

(天命)을 다시 한번 연장시킬 수도 없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타오르는 심장의 불꽃이 역시

운명의 매를 막을 수 없을 때엔 모든 희망은 간 것입니다. 여기 결국 최후의 공포는 슬픔에 찬 밤

에 싸여 오고야 맙니다.

  세상의 많은 어머니시여! 당신네들은 이미 우리가 당신네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린 줄 알고

계시겠지요만, 우리들 마음 속 깊이는, 그러나 아직도 오히려 말살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당신

네에게 얽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여성(女性)은, 그들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점에 있어서 참으로 이 위에도
없이 신성(神聖)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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