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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주부송(主婦頌) / 김진섭

by 혜강(惠江) 2008. 11. 22.

 

<수필>

 

주부송(主婦頌)

 

- 김진섭 

 



  한말로 주부(主婦)라고는 해도,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형태로 꾸민, 말하자면 다모다채(多貌多彩)한 여인상을 안전(眼前)에 방불시킬 수 있겠으나, 이 주부라는 말이 가진 음향으로서 우리가 곧 연상하기 쉬운 것은 무어라 해도 백설 같이 흰 행주치마를 가는 허리에 맵시도 좋게 두른 여자가 아닐까 한다. 그러한 자태의 주부가 특히 대청마루 위를 사뿐사뿐 거닌다든가, 또는 길에서도 찬거리를 사 들고 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실로 행주치마를 입은 건전한 주부의 생활미를 한없이 찬탄하고 사랑하며 또 존경하는 바다. '먹는 자(者) 그것이 사람이다.' 하고 일찍이 갈파(喝破)한 것은 철학자 루우드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에르바하였다. 영양(榮養)이 인간의 정력과 품위를 결정하는 표준이 되는 사실은 우리들 생활인이 일상 경험하는 일에 속하거니와, 그러므로 우리들이 음식을 요리하는 주부의 청결한 손에 의존하고 있는 정도는 참으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으니, 말하자면 주부는 그 민족의 체력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체력을 담당하고 있는 주부의 각자가 만일에 도마질에 능숙하지 못하고 좋지 못한 솜씨를 가질 때, 그것은 한 가정의 우울에만 그칠 문제가 아닐 것이요, 국가의 영고(榮枯)에까지 관하는 문제가 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는 영양의 불량이 가져오는 각종의 질환과 악결과를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우선 먹어야 되고, 또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므로, 싱거웁고 무미한 밥상을 제공하는 주부는 여자로서의 제1조건을 상실할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재료의 음식도 주무르는 그 사람의 손에 의하여, 그 맛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것은 우리들이 다 잘 아는 사실이니 주부학의 제1과가 영양학과 요리법에서 시작되는 것을 적어도 여자는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영양은 반드시 좋고 비싼 재료에서만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이상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므로, 그 맛을 주부는 연구한다는 것이 필요하며, 전래의 요리법에 부단히 신선한 변화와 생채(生彩)를 가하도록 명심하고 노력하는 주부야말로 참된 주부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 생활인이 진심으로 칭송하고저 하는 주부는 국민 경제의 무엇임을 이해하고, 자기가 사들이는 외국산품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일 때 국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을 짐작하는 주부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 요리는 언제나 같다.' 는 비난을 우리는 가끔 듣고 있거니와, 만일에 조선의 요리가 조금도 진보를 보이고 있지 않다면, 그 대부분의 책임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들의 주부에게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하여 먹어야 될 시장한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주부의 아름다운 의무를 극구 찬양(極口讚揚)하는 자다.

   이상으로서 우리는 민족의 체력을 담당한 주부의 일면을 보아 왔거니와, 다음으로 우리는 먼지를 터는 주부,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는 주부의 의무를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주부는 실로 가족과 가정의 위생에 대한 전책임을 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진부(陳腐)한 말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사람이 깨끗한 장소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결코 적은 기쁨은 아니니, 주부가 만일에 위생 관념이 없어서 이 제2의 아름다운 의무를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곰팡이와 물것과 세균이 제멋대로 번영하는 음울하고 난잡한 주택 속에서 불결한 공기를 호흡하고 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불결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오늘날 설명할 필요는 없으려니와, 이것이 또한 흔히 사상과 도의(道義)의 오탁(汚濁)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는 점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위생의 수호자로서의 주부의 중대한 사명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쓸고 닦기와 뒷설거지 등속은 무릇 천업(賤業)이요, 누구나 다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과적(日課的)으로 성의 있는 청소는 주부라야만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니, 비질 한 가지에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심성은 유로(流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를 손에 든 주부의 소박한 미의식 속에는 상상 이상으로 모든 추악한 것, 병적인 것에 대한 치열한 투지가 맥동(脈動)하고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주부가 일보를 진(進)하여 위생의 수호자로서의 자기의 좋은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서는 약간의 약제학(예방의학, 가정의학)의 지식까지도 알고 있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소위 백의의 민족이요, 특히 부인들의 정백(淨白)한 의복은 언제나 외국인의 주목을 끌고 있거니와, 주택 내외의 청소도 그처럼 완전한가 하면 이것은 곧 누구나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본 리비히는 '그 민족의 위생 상태는 비누의 연 소비량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확실히 우리 겨레만큼 세탁에 분망한 민족은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그 수일(秀逸)한 결벽성(潔癖性)이 주부의 손을 통하여, 모든 다른 부면(部面)에 있어서도 실천되기를 우리는 심원(心願)한다. 여자의 생명은 아름다운 얼굴에 있기보다도 깨끗함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 있다. 빨래를 하는 표모(漂母), 비질을 하는 청소녀(淸掃女),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한 폭의 청신한 생활화(生活畵)인가! 

  영양의 여왕이요, 위행의 수호자로서의 주부의 제3의 천직은 두말할 것 없이 손에 바늘을 들며, 혹은 재봉틀 앞에 좌정(座定)한다는 것이니, 의복에 대한 책임이 또한 주부의 소관에 속하는 것이다. 옛날의 주부는 베틀을 돌려 실을 자아내며 길쌈을 하기에 자못 분망(奔忙)하였다. 다행히 오늘의 기계 문명은 주부에게 이 크나큰 업무를 하지 않아도 좋도록 하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남자는 대개 양복을 입고 아이들까지도 기성복을 사서 입으면 되는 생활을 현재는 하고 있는 까닭으로, 의생활에 있어서의 주부의 임무는 적지않이 경감된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는 해도 의복의 수호자로서의 책임은 결국 영원히 주부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즉 떨어진 옷을 꿰매고, 헌 옷을 줄이기도 하며, 키우기도 하여, 철이면 철 따라 장만해 둔 옷가지를 내고 넣고 하는 일이 주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니, '의복이 사람을 만든다.'는 저 유명한 말 속에 나타난 사회 심리학적 의식을 적어도 주부는 일시라도 망각함이 없이 가족 각원(各員)의 이상적 형식미에 항상 유의하는 바가 있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호사를 권하는 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되나니 더덕더덕 기운 아이들의 꿰진 헌 옷가지 하나에서도 그것이 보는 눈에 정결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 어머니의 정성과 애정과 결백과 절제와 고심과 기교와 검소―이 모든 고덕(高德)을 그곳에서 넉넉히 느낄 수 있으며, 또 가령 누구나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새 비단 양말보다는 바늘로 겹겹이 수놓은 헌 면말(綿襪)의 뒤꿈치에 우리는 진심으로 그 주인의 행복과 아울러 경건한 생활감을 만끽할 수 있는 까닭이요, 다름아니라 구것이 곧 생활인이 사랑하는 참되고 존절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헌 옷이 있어야 새 옷이 있다는 말을 모르며, 꿰매고 깁기에 태만한 여자는 옳은 주부라고는 할 수 없으리니, 그러므로 응당 바늘, 실을 든 주부의 손 위에는 전민족의 감사에 넘치는 찬사가 빗발같이 쏟아져야 될 것이다. 나날이 닥치는 생활고를 그들을 위하여 사랑과 웃음으로 가볍게 극복하고, 씩씩하게, 건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나가는 주부의 강인한 생활력보다 더욱 신성한 것이 과연 이 세상에 다시 있을까? 우리들 생활인은 생활인의 아름다운 반려(伴侶)요, 생활인의 충실한 수호자(守護者)인 주부를 한없이 예찬하려 한다.

  사람을 찾아서 그 가정에 척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 집의 여주인공을 보지 않고도 우리를 일시에 포위하는 명랑한 광선과 유쾌한 공기 ― 그 명암상(明暗相)과 농도(濃度)의 여하에 의하여 우리는 곧 그 집을 다스리는 주부의 사람됨을 감촉할 수 있는 것이니, 집안에 놓인 세간살이의 배치 한 가지에도 주장되는 주부의 신경과 마음과 배려가 얼마나 세밀하며, 또 조잡(粗雜)함을 능히 간파(看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놓일 자리에 놓인 푹신한 안락 의자, 적당하게 광선을 조절하여 기분 좋게 드리워진 시원하고 깨끗한 커튼, 창가에 얹힌 화병 속의 청초한 꽃송이 ― 눈에 띄는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우리를 가벼운 행복감에 취하게 하는 가정이란 있는 것이니, 원래 가정은 그 가정 자체 ―그  남편과 여자를 위하여서만 있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이요, 그곳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위하여서도 응당 있어야 될 영혼의 고요하고 아늑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 생활에는 없지 못할 사교(社交)의 중심점이 되고, 또 되어야 하는 자기의 자랑스러운 의무를 인식하고 이행하는 주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사실상 한 주부의 변함없이 친절하고 우아한 접대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과 신념과 감동과 만족과 영향은 의외로 큰 것이며, 소위 '성화(聖火)'를 간직하는 주방의 수호자인 아름다운 주부가 정성으로 제공하는 한 잔의 따뜻한 차, 몇 잔의 향기로운 술, 한 상의 맛있는 음식은 참으로 우리와 우리들의 고달프고 괴로운 생활을 얼마나 위로해 주며, 얼마나 즐겁게 하여 주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들 생활인은 우선 행주치마를 허리에 두른 믿음직스럽고, 건강한 주부의 생활미를 한없이 찬탄하며 또 존경하는 자이니, 여자의 첫째 자격은 실로 다름 아니라 그가 입은 행주치마에서 시작되는 까닭이다.  이제 우리 신생 대한(新生大韓), 새 나라의 새 살림을 맡은 주부들의 사명은 참으로 얼마나 거룩한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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