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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34] : 어느 사랑의 기록 - 남진우

by 혜강(惠江) 2008. 10. 31.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34]
 
           어느 사랑의 기록 -

 

                           

                             ▲ 일러스트=이상진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친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친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에 옷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 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1996년>

 

 

<해설>  더 발칙해져라 사랑에 관한 상상이여

- 김선우·시인

 

 

  '킹 크림슨'이란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 있다. 남진우(48)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1969년에 나온 킹 크림슨의 데뷔앨범이, 그중에서도 세 번째 트랙, 〈묘비명(Epitaph)〉이 떠오른다. 남진우의 데뷔작은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이라는 긴 제목의 시다. 크림슨 왕과 로트레아몽 백작은 죽음과 절망과 고독을 통해 사랑에 닿는다. 우회로의 비밀스러운 쾌락을 아는 악동들.

  〈어느 사랑의 기록〉은 남진우의 두 번째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들어있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이 시집은 집요하게 죽음에 탐닉한다. 시의 첫 행인 '사랑하고 싶을 때'를 우아하고 낭만적인 사랑의 관념으로 읽지 마시길. 혹은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시길. 이 시는 성/성행위의 구체성을 떠올리며 읽을 때 한층 흥미로워진다. 천천히 다 읽고 나면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조금도 섹슈얼하지 않은 섹스(사랑),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찌르는' 섹스(사랑)의 슬픔. '야동'의 세계에 흔하디 흔한 사도마조히즘이 쾌락에 봉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밖의 배신감. '죽이며 죽어가는' 참혹한 섹스(사랑)를 통과해 비로소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길 떠나는 로트레아몽 백작의 실루엣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풍경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몫. 이 시는 사랑/성/성행위를 통해 유발될 수 있는 낭만적이고 보편적인 우리의 기대심리를 배신한다. 그리고 한 발짝 더 간다. 배신 당했는데 어딘지 묘하게 홀가분할 수도 있다는!

  데뷔작의 이미지를 끈질기게 짊어진 채 남진우가 천착하는 세계는 '시인의 운명'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삶이자 죽음인 언어의 축제를 주관하는 로트레아몽은 언어를 흡혈하는 뱀파이어. 그가 부르는 이런 '사랑노래'는 어떤가. '사랑하는 그녀가/ 화분에 내 머리를 옮겨 심는다/ 물을 주고 햇볕 잘 드는 곳에 가져다 놓는다/ 아침마다 식탁을 차리며 그녀가 부르는 노랫소리/ 무럭무럭 자라거라/ 내 어여쁜 머리/(…)/ 간혹 화가 나면 그녀는 아무거나 집어 던진다/ 박살 나는 화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머리통/ 한때 그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내 얼굴이 바닥에 흩어져 나뒹군다/ 잠시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다가/ 다른 화분에 내 머리를 주워 담는다/ 온통 멍든 얼굴로 나는 다시 한사코 꽃을 피워 올린다'(〈연가〉 부분). 무엇을 느껴도 좋다. 사랑도, 사랑에 관한 상상도 더 발칙해져라. 사랑과, 사랑에 관한 상상은 무한 자유이므로! 사랑은 늘 '어느' 사랑의 기록 아닌가.

 

<출처> 2008. 10. 3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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