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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4]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by 혜강(惠江) 2008. 9. 25.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 일러스트=이상진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떠돌던 그곳… 너는 없다
김선우·시인  

 

  청파동엔 숙명여대가 있다. 소나무 숲이 넓은 효창공원은 달밤이 좋았다. 분식집을 지나 강의를 하러 언덕배기를 오르는 시인들이 자주 보였다. 그 애와 내가 밥 삼아 먹던 오래된 와플하우스 주위로 감귤처럼 까르륵 굴러 내리던 추억들이 눈에 선하다. 가보면 모두 와 있는데 너만 없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잠든 연인들의 지붕에 하얀 눈이 쌓이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자던 청파동엔 봄이 와도 봄이 아니며 가을이 와도 가을이 아닌 가을뿐이다. 너 없는 벌판에 왔다 가는 여름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쓸쓸하고 추운 삶을 겸허하게 껴안으며 한 이불을 덮고 서로 다리를 포개던 청파동. 기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넘어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시절, 그 청파동을 기억할 수 있는가.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 어이 휘몰아칩디다.' (〈가을〉)

  최승자의 시가 노래했듯이, 세월이 가도 한번 온 것은 언젠가 다시 오는가. 내 기억 속의 그대 라일락꽃으로 오려는가. 어디만큼 다시 쇠꼬챙이로 오긴 오는가. 다시 네게 가 최후로 찔리면서 오래 오래 죽고 싶은데, 한 떨기 꽃이 쪼그라든 낙엽으로 오기도 하고 봄바람이 미친 바람으로도 오는 것이 보인다. 가혹한 사랑의 백만 가지 얼굴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의 시는 세상을 사랑하려는 자의 치열한 난중일기다. 그래서 그의 시는 격렬하고 숨가쁘다. 싸움터의 후미가 아니라 맨 앞에서 창상으로 거덜나며 세상을 뚫고 가려는 안간힘이다. 최승자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년)과 《즐거운 일기》(1984년) 없이 1980년대의 우리 문학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시어가 보여주는 순도 높은 비극의 진정성에 홀렸다. 맨몸, 오직 혼신의 맨몸으로 세상의 비극을 향해 날아가 꽂히는 샤먼의 시가 우리를 뿌리부터 적셨으므로. 표창처럼 날리는 그의 시어에 기꺼이 찔린 우리의 상처는 고통스럽고도 환했다. 고통을 통과해 마침내 시원해지는 환부!

  지금 그 최승자 시인이 아프다. 병상의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한쪽 마음이 절룩거린다. 사랑 없는 시대에 사랑을 얻으며 사는 일의 귀함을 온몸으로 외치며 그는 우리를 대신해 아픈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독자여, 마음 모아 그의 쾌유를 빌어주시라. 사랑의 에너지를 믿는 그 마음으로.


<출처> 2008.09.25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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