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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가벼운 산 / 이선애

by 혜강(惠江) 2008. 1. 2.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가벼운 산

                                                    - 이선애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당선 소감 >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라는 느낌 들어”

  
▲ 이선애씨
   매년 이맘때면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자그마한
 ‘여성문학지’를 만든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있는 엄마들의 곱고 섬세한 손길로 엮은 이 책은 지역사회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책 읽는 습관, 문학의 저변확대를 꾀하고자 함이다. 어언 여섯 번째 세상에 나올 우리들의 아기를 기대하면서 출판사 편집실에서 최종교정을 마치고 OK 사인을 내던 찰나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소식이다.
 
   떨리는 손끝과 가슴에 또 하나의 산통이 스친다. 몸속 아기가 앉았던 자리에 시를 앉히고 자신을 낳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수많은 언어들이 시간의 벽을 허물며 웅웅 메아리친다. 이제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란 느낌이 든다. 세상에 갓 던져진 갓난아기인 나를 위하여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엄마가 된 것이다.
 

  당장 배고픈 나를 위하여 옥타비오파스의 말을 빌린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자기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아르테미르 여신처럼 즐겁게 시를 낳는 풍요와 다산의 힘을 기르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진학한 광주대학교 문창과 대학원이 고맙다. 열심히 지도해주신 이은봉, 신덕룡 교수님, 외에도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내이기보다는 공주이기를 소망한 나를 탓하지 않고 묵묵한 눈길로 지켜봐 주신 남편과 함께 공부한 지선, 성희, 인드라망 문학모임 식구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다. 예기치 않은 기쁜 소식 주신 서울신문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고려대 최동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심사위원님들께도 큰 절을 올린다. 좋은 시로 갚아야 할 너무 큰 빚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시를 낳는 엄마가 되기를 자청해본다.

 

이선애 약력

-1955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방송대 국문과 졸업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돋보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 온 시편들을 정밀하게 읽고 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최종심의 대상을 다섯 편으로 압축하였다.‘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송인덕)는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난초와 칼´(이연후)은 이미지의 선명성이,‘양치하는 노파´(한세정)는 시적 함축성이,‘바닷가 떡집´(김영진)은 진득한 삶의 감각이,‘가벼운 산´(이선애)은 시적 발상 전환이 돋보였으나 각각 그 나름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시편을 놓고 좀 더 범위를 좁힌 결과 세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난초와 칼´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두드러지지만 대립구도가 너무 단순하고,‘가벼운 산´은 시적 발상 전환이 참신했으나 설명적인 부분이 시적 밀도를 약화시켰으며,‘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는 자연스러운 시적 전개가 강점이지만 상식의 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엇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가벼운 산´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노파의 손등에서 고통의 향기를 관찰한 시인의 시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 하겠다.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이 시적 구도 속에서 빛날 때 남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시금 되새겨 주기 바란다.

                                                  - 오세영·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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