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매화찬(梅花讚)
김진섭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한풍(寒風)을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초지상적(超地上的)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 속에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 달 아래 처연(悽然)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筆頭)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적설(積雪)과 한월(寒月)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親和)한 동감(同感)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이 태탕( 蕩)한 계절에 난만(爛漫)히 피는 농염한 백화(百花)와는 달라, 현세적인, 향락적인 꽃이 아님은 물론이요, 이 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超高)하고 견개(狷介)한 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서 찬 돌같이 딱딱한 엄동(嚴冬), 모든 풀, 온갖 나무가 모조리 눈을 굳이 감고 추위에 몸을 떨고 있을 즈음, 어떠한 자도 꽃을 찾을 리 없고 생동(生動)을 요구할 바 없을 이 때에, 이 살을 저미는 듯한 한기를 한기로 여기지 않고 쉽사리 피는 매화, 이는 실로 한때를 앞서서 모든 신산(辛酸)을 신산으로 여기지 않는 선구자의 영혼에서 피어 오르는 꽃이랄까?
그 꽃이 청초하고 가향이 넘칠 뿐 아니라, 기품과 아취가 비할 곳 없는 것도 선구자적 성격과 상통하거니와, 그 인내와 그 패기와 그 신산에서 결과(結果)된 매실(梅實)은 선구자로서의 고충을 흠뻑 상징함이겠고, 말할 수 없이 신산한 맛을 극(極)하고 있는 것마저 선구자다워 재미있다.
매화가 조춘 만화(早春萬花)의 괴(魁)로서 엄한(嚴寒)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화하는 것은, 그 수성(樹性) 자체가 비할 수 없이 강인(强靭)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동양고유의 수종이 그 가지를 풍부하게 뻗치고 번무(繁茂)하는 상태(狀態)를 보더라도, 이 나무가 다른 과수(果樹)에 비해서 얼마나 왕성한 식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므로 또한 매실이 그 독특한 산미(酸味)와 특종의 성분을 가지고 고래로 귀중한 의약(醫藥)의 자(資)가 되어 효험(效驗)이 현저한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할밖에 없다.
여하간에 나는 매화만큼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영춘(迎春) 관상용(觀賞用)으로 재배되는 분매(盆梅)에는 담담한 가운데 창연(蒼然)한 고전미가 보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청고(淸高)해서 좋다.
* 이해와 감상
동양 문화권에서는 매화를 사군자(四君子) 중의 으뜸으로 치고 많은 학자, 문인, 선비들이 그 덕을 찬미하여 왔다. 이 수필은 이처럼 전통적 매화 예찬과 맥락이 이어지면서, 근대 수필의 개척자인 김진섭의 수필 문학 세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우리 근대 수필의 한 양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글은 수필 일반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근대 수필의 특성도 가늠해 보며 나아가 기품 있는 삶을 추구하였던 선인들의 긍지를 존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글이다.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매화는 추위를 타지 않고 적설과 한풍을 택해 피어나며, 초지상적이고 비현세적인 꽃이기에 경탄해 마지 않는다. 초고하고 견개한 꽃인 매화는 또한 선구자적 기품과 기백, 동양적인 인상과 청고한 고전미가 있어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의 몇 가지 표현상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체적인 관찰을 통해 매화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으며, 이를 인생과 관련지으면서 예찬하는 이면에 필자의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 둘째, 난해한 한자어의 사용과 함께 고졸한 인격미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셋째, 문장의 길이가 길고, 문장의 흐름이 우리말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면도 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시조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시조로 안민영의 '매화사'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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