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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창원 김달진문학관, 고도의 정신주의와 불심(佛心)의 세계를 열었던 시인

by 혜강(惠江) 2022. 3. 14.

 

창원 김달진문학관

 

고도의 정신주의와 불심의 세계를 열었던 시인

 

 

글 · 남상학

 

 

 

 

 

 

 

  "자유와 신비여, 오직 그대 하나만을 몸에 지닌 채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나는 인생의 평안과 조화, 덕과 사랑의 광명을 볼 수가 있다." - 「산거일기」 중에서

 

 

  1930년대 『시원(詩苑)』,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이었던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고도의 정신주의 시 세계를 열었던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자 교사로 일생을 살아왔다. 나는 그의 삶과 문학적 향기를 만나러 국토의 남단 멀리 진해 소사마을로 향했다.

 

 

 

 

 

 

  진해 소사마을에는 예술의 거리가 조성돼 있는데 1930년대 근대의 거리의 느낌을 표현하는 듯하다. 1900년대 풍경을 담고 있어 시대극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옛 간판들이 줄지어 있어 그 앞에 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하다.

 

  흑백 TV, 타자기, 괘종시계 등 그 시대 물건들이 전시된 '김씨박물관', 박배덕 화백이 직접 운영하는 박배덕 갤러리, 구멍가게를 그대로 옮겨둔 '김씨공작소', 역사자료관, ‘소사주막' 등 즐길거리가 다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시의 정신주의적 세계를 확고히 한 시인 월하 김달진의 생가와 김달진문학관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는 시인 월하 김달진의 문학과 불교에 대한 열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경남 진해구 소사로 59번길 13에 2005년 김달진 문학관을 개관했다.

 

  문학관 개관에 앞서 이미 진해에서는 1995년 4월에는 김달진의 제자인 경남대학교 교수 신상철이 중심이 되어 김달진 시비를 건립하였으며, 1996년부터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를 주축으로 김달진문학제전위원회를 결성하여 해마다 가을에 김달진문학제을 개최해 왔다. 그리고 2004년 김달진 시인 생가도 복원하였다.

 

  김달진의 생가에는 커다란 마당을 포함해 밭, 화단이 조성되어 있어 소박한 시골집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민속적인 분위기는 따스하고 포근한 그의 인품을 보여준다.

 

 

 

 

 

  김달진의 문학적 혼을 알리기 위해 개관한 김달진문학관은 총 지하 전시관과 1층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김달진문학관은 외관이 시골의 학교를 보는 것 같은 인자한 느낌이 풍겨온다. 들어가기 전에는 아이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문학관 내부에 들어서면 김달진 선생의 실물 사진이 맞이해주고 있으며 생전에 직접 사용한 유품과 사진, 연구 문헌들도 있어 그의 생애와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기 좋다.

 

 

 

 

 

 

 

  일제강점기였던 1907년 진해구 웅동 소사리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호는 월하(月下).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신병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요양했다.

 

  192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가 경신중학을 다녔지만 4학년 때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 운동을 벌이다 퇴학을 당해 다시 낙향한 뒤 1926년부터 모교인 계광보통학교에서 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달진이 등단한 것은 이때이다.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공론』지에 무애 양주동의 추천으로 시 「잡영수곡(雜詠數曲)」이 실리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고, 이어 1929년 4월 『조선시단』에 「상여 한 채」, 「단장일수(短章一首)」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원』 동인으로 참가하여 1934년 9월 『동아일보』에 「나의 뜰」, 「유점사를 찾아서」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했다.

 

  모교이자 교사생활을 이어가던 계광보통학교가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자 민족 현실의 절망과 좌절에 빠졌던 그는

 

   “하이얗게 쌓인 눈 우에/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김달진의 「눈」)

 

  라고 노래하며, 1934년 속세를 등지고 입산해 불자의 길에 들어섰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김운악(金雲岳) 스님을 은사로 승려가 된 그는 1935년 함양 백운산 화과원(華果院)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193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해 11월 창간호에 「황혼」을 발표하고, 1938년에는 「샘물」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30세 때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 학승의 길을 걸으며, 1939년 시집 『청폐(靑枾)』를 냈고, 『장자(莊子)』 등의 작품을 번역하며 동양적인 인생관을 가진 시인으로 활동했다.

 

 

 

 

 

 

  또, 1940년에는 관념이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서정의 세계를 담은 『청시(靑柿)』를 발간했다. 『청시(靑柿)』에 수록된 작품을 보면,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 「청시(靑枾)」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 「비시(扉詩)」 전문 *필자 주 : 비(扉)-문짝, 사립문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地球)의 섬 우에 앉았다.

 

    - 「샘물」 전문

 

 「청시」는 자연의 순수한 상태에 대한 직관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시의식의 출발점에 해당하며, 「샘물」에서는 이러한 물아일여적(物我一如的) 상상력이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시집은 사물의 성숙과정을 통해 순간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완성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면 탐구에 주력하던 시인의 초기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무렵, 잠시 북간도 용정에 다녀왔는데, 만주 시절에는 용정에 머물면서 소설가 안수길이 발간하고 있던 잡지 『싹』에 시를 게재해 이때의 시 「향수」 등이 김조규가 엮은 『재만조선인시집』에 실리기도 했다.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찾아온 뒤,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당시 『동아일보』 주간이던 설의식을 알게 돼 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고,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문학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인심을 어지럽히는 세상에서 자신의 활기찬 순수를 보호하는 길은 수도 생활과 같은 교사 시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울 생활을 청산한 뒤 대구로 내려갔다. 경북여자중학교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죽순(竹筍)』 등의 시 전문지에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진해로 돌아온 것은 1948년이었다. 당시 6년제 학교였던 진해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 『자유민보』 논설위원과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1954년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출간했고, 이때부터 30여 년간 고전과 『고려대장경』 등 불경 번역 사업에 몰두했다.

 

  그 후 현 창원남중학교인 남면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1962년 퇴직 때까지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퇴임 후 고려대장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면서 문단의 은자로 잊혔던 그는 1967년 『신문학 60년 기념 100인 시선』에 「임의 모습」을, 1973년 『불교사상』에 「산거일기」를 연재했으며, 이듬해엔 불전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불리는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를 내는 정도로 침묵했다.

 

 

 

 

 

 

  이후 1979년 동인지 『죽순』 복간호가 발간되면서 「벌레」, 「속삭임」, 「낙엽」, 「포만」 등을 발표했다.

 

  김달진이 한국 문단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3년시 선집 『올빼미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는 동양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자연을 노래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 정신을 더욱 깊이 있는 시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달진은 그 외에도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 서사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선시집(禪詩集)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 수상집 『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시는 동양적 정밀(靜謐)과 달관의 자세에 기초한 것으로서, 세속적 영욕이나 번뇌를 초탈한 절대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문학사적으로는 한용운에서 조지훈으로 이어지는 동양적 정신세계와 신석정 등의 불교적·노장적 시 세계를 독자적으로 계승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말년에 그는 숙원 사업이었던 『한국선시(韓國禪詩)』와 『한국한시(韓國漢詩)』 간행을 마치고 1989년 6월 7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1990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김달진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에 수록된 시를 읽다 보면 깨달음을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기나긴 어둔 이 밤 언제 샐런가/ 다시 얻기 어려운 덧없는 이 몸을/ 천만 시름 속에 몸부림치네./ 어둠을 깨치는/ 새벽 종소리는 언제나 들릴런가.” -김달진 「모월모일」에서

 

   “티끌과 때를 씻어주는 물처럼/ 이롭게 하는 이나 해롭게 하는 이나/ 그들에게 자애로운 평등한 마음 길러/ 자 바라밀을 완전히 성취하면/ 마침내 너는 최상 보리 얻으리.” - 김달진의 「참다운 법」에서

 

 

 

 

 

 

  김달진문학관에서는 1990년부터 인간이 구현해야 할 정신주의 영역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달진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1995년 김달진 시비를 건립하였고, 1996년부터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김달진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연중 10회에 걸쳐 지역주민을 위해 ‘시낭송 시노래 음악콘서트’를 열고 있으며,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일반부에 걸쳐 월하김달진백일장을 개최하고,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문학교실의 요람이 되고 있다. 또, 심포지움과 문학강연회 등도 개최하고 있다. 이런 활발한 활동으로 2016년도에는 ‘올해의 최우수 문학관’으로 선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상세정보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로59번길 15 (소사동 41-2)

▻전화 : 055-547-2623

▻관람 : 오전 9시~오후 6시 (겨울철 11~2월은 오후 5시까지)

▻휴관 :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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