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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영천 노계문학관, 한국 가사 문학의 3대 시성 박인로(朴仁老)

by 혜강(惠江) 2022. 3. 12.

 

영천 노계문학관

 

한국 가사문학의 3대 시성 박인로(朴仁老)를 찾아가다.

 

 

글·사진 남상학

 

 

 

 

 

 

  경상북도 영천에는 노계문학관이 있다. 노계문학관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눈부신 금자탑을 세운 노계(盧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선생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이다.

 

  노계 박인로는 포은 정몽주 선생, 최무선 장군과 함께 영천에서 가장 추앙받는 위인 중의 한 사람이다. 노계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계서원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1단계로 노계 선생의 457주년 탄신일에 맞춰 2018년 개관했다.

 

  영천 북안면 소재지를 지나 명주리로 가는 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들어서면 도천리 마을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다시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밑을 지나면 도천1리 '괴화마을'이다.

 

  노계 박인로는 1561년 6월 12일 이 괴화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천1리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50m쯤 가면 오른편 넓은 골목길 안쪽에 노계 생가터가 남아 있다. 600여㎡ 터에 초막 같은 노계의 옛집은 찾아볼 수 없고 시멘트벽의 작은 집이 있다.

 

  북안면 도천리에 세워진 노계문학관은 총면적 441㎡ 규모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에 기와를 얹은 1층 건물이다. 문학관에는 노계 선생의 80여 년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과 영상실, 소강의실, 다목적실 등을 갖췄다. 또, 소공원, 원두평저수지 주변 산책로와 전망대, 팔각정, 노천광장도 조성되었다.

 

 

 

 

 

노계 박인로는 누구?

 

  노계 박인로는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 가사문학의 3대 시성(詩聖)이다. 영천에서 출생한 그의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翁).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노계 박인로는 송강 정철을 잇는 뛰어난 문인이면서도 무신(武臣)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30대 청년이었던 그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으로 참전한다.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전쟁의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짓기도 했다.

 

  “… 천운이 순환함을 알겠도다, 하느님이시여/ 이 나라를 도우시어 만세무강 누리게 하소서./ 요순 같은 태평 시에 삼대일월 비추소서./ 천만 년 동안에 전쟁을 없애소서./ 밭 갈고 우물 파서 격양가를 부르게 하소서./ 우리도 임금님 모시고 함께 태평을 즐기리라.”

 

  이것은 노계 박인로의 「태평사」 끝부분을 현대어로 표기한 것이다. 노계는 하느님(天)을 청자(聽者)로 설정해서 작자가 소망하는 이상세계가 실현되기를 강렬하게 염원하고 있다. 나라를 근심하는 충효 사상과 평화와 태평성대가 계속되기를 염원하는 충정이 깔려 있다.

 

 

 

 

 

  한문 어투와 고사성어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그 문체가 강건·웅렬·화려하고 무인다운 기상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작자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문학사상 3대 가인으로 꼽힐만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수많은 가사와 시조를 남겼는데, 가사는 정철에, 시조는 윤선도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다. 박인로가 남긴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이 노래는 4수로 된 연시조로 ‘조홍시가’의 제1수이다. 우리에게 ‘한음’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이덕형(李德馨, 1561∼1613)에게서 홍시를 대접받은 작가가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시조이다.

 

  그는 초장에서 소반 위에 있는 먹음직한 홍시를 보고 곱다고 생각한다. 중장에서는 그 홍시를 보고 회귤 고사(懷橘故事)의 유자를 떠올리며 고사의 주인공인 중국 오군 사람 육적(陸績)처럼 부모님께 드리기 위해 홍시를 품어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홍시를 가져가도 반길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서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노계의 이 작품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효’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 시조에 드러난 대로, 박인로와 이덕형의 친교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계는 39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해 수문장과 선전관 등을 지냈다. 40세에 이르러 이덕형과 평생을 이어질 교류를 시작하여 ‘평생친구’로 지냈다.

 

  40대 중반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내용을 담은 절창 「선상탄(船上歎)」을 쓴 그는 52세에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 벼슬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 영천으로 돌아간다.

 

 

 

 

 

그칠 줄 모르게 타오른 ‘문학을 향한 정열’

 

 

  영천으로 돌아와서 노계는 옛 성인과 현인들의 책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뜻을 마음 깊숙이 새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서 주공(周公·중국 주나라 시대의 정치사상가)을 만나 받았다는 네 글자 '성·경·충·효(誠敬忠孝)'의 가르침을 받고. 그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 글자들이 품은 의미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노계문학관 앞뜰에는 이 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50대에는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소유정가」 등을 지었고, 회갑을 넘겨서도 예술적 정열을 그대로 간직하며 「입암이십구곡」과 「노계가」, 「영남가」 등을 지었다.

 

 

 

 

 

  한번은 10여 년 전부터 친교를 맺어 온 한음 이덕형을 찾아 천 리 길이나 되는 용진(현재 양평)으로 떠났다. ‘사제’는 용진에 있는 이덕형의 휴양처이다. 한음은 북인 세력과 갈등으로 정계에 물러나 경기도 양평 본가에 머물고 있었다.

 

  노계는 가사 「누항사(陋巷詞)」에서 향촌 괴화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유우자적하는 모습을 노래한다. 괴화마을은 노계의 가사 '누항사'의 무대다.

 

  “누항 깊은 곳에 초막을 지어 두고/ 바람비 조석에 썩은 짚이 섶이 되어/ 서홉 밥 닷홉 죽에 연기만 많이 난다/ 덜 데운 숭늉으로 빈 배 속일 뿐이로다/ 생애 이렇다고 장부 뜻을 옮길런가/ 안빈낙도 한마음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 의를 따라 살려 하니 날마다 어긋난다. (중략) 나의 가난 싫다고 여겨 손짓한다고 물러가랴/ 남의 부귀 부러워한들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 속에 원망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마는/ 내 생활 이러하니 서러운 뜻 없도다.”

 

  현대어로 옮긴 누항사의 한 구절이다. '누'는 ‘누추하다’는 뜻이고, '항'은 사라진 글자로 오늘날 작은 거리나 골목을 가리킨다. 누항은 누추한 마을로 자기가 사는 동네의 겸칭이다.

 

  가난하지만 옳은 일을 추구한다는 노계의 사상이 담겨 있다. 누항사에는 노계가 서쪽 두둑 높은 논에 물을 댄 뒤, 소를 빌리러 갔다가 쫓겨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구절도 있다. 노계가 물을 댄 논은 괴화마을 서쪽 산자락으로 추정된다.

 

 

 

 

 

  이 노래는 한음 이덕형이 그에게 두메 산골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지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빈이무원하고 충효, 우애, 신의를 지향하는 삶을 노래하고 있다.

 

  한편, 노계는 영천에서 열흘 이상 걸리는 한강 두물머리까지 찾아가 이덕형의 빈객이 되어 수 개월간 용진에 머물면서 사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음을 화자로 하여 노래했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가사 「사제곡」이다.

 

  “늙고 병든 몸, 쉬도록 허락해 주시어/ 한강 동쪽 땅 경관을 찾아 물 따라 산 따라/ 용진강 거슬러 올라 사제마을에 들어서니/ 천하제일 강산이 임자 없이 버려져 있구나/ 내 평생 꿈을 꾸어 오라고 해서 그랬는지/ 이곳 물빛 산색들이 낯설지 않구나/ 무정한 산수도 유정 천리로구나”

 

  용진강은 북한강을 일컫고 긴 제방이 있어 ‘사제’라 했다. 아름답기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오백 년 한음 종가가 있고 다산 정약용의 본가와 삼십 리 이웃으로 다산 가문과 한음 가문은 친교가 깊었다. 또, 그의 「권주가(勸酒歌)」는 안빈낙도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 … 진시황 한무제도 남들처럼 죽었는데/ 시골 가난한 백성이 어느 세월에/ 좋은약 얻어먹고 신선이 되겠는가/ 인생 칠십도 예로부터 드물거늘/ 몇백 년 살겠다고 저렇게들 여유엾이 사는가/ 영예는 욕과 더불어 오고 부귀영화도 헛된 것인데/ 살아 있을때 술 한잔 먹는 것을 꺼릴 이유 무엇인가/ 술 한잔 아니하면 이 시름을 어찌 달랠까/ …… / 부자나 시인이나 죽을 때 무엇을 가져가며/ 죽은 후에 산소에 술 부어준 들 무슨 소용일까/ 모두가 다 그런 인생이니/ 살았을 때 마음껏 마시며 즐겨보세”

 

  노계는 70세 나이를 넘길 때까지 한음을 그리워하며 「권주가」와 「상사가」, 「노계가」를 지으며, 가까운 친구들과 교유하면서 82세까지 장수했다. 가사문학 연구자들이 "보기 드문 놀라운 성취"라고 평가하는 「노계가(盧溪歌)」는 자그마치 76세에 지은 것이다.

 

 

 

 

 

  박인로는 생전에 시조 68수와 가사 11편, 다수의 한시를 남겼다. 송강이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등 5편에 그친 데 비하면 훨씬 많은 편이다

 

  노계 박인로의 작품들은 1831년 목판본으로 출간된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盧溪集)』에 대부분의 작품이 실렸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된 것 역시 적지 않다. 『노계집(蘆溪集)』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었다.

 

  노계문학관을 둘러보았다면 노계 시비가 있는 소공원을 지나 그 위쪽으로 도계서원과 원두평저수지, 노계 선생 묘소까지 둘러볼 수 있다.

 

 

 

 

 

도계서원과 묘

 

 

  노계문학관 바로 옆쪽에 노계 박인로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도계서원이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1707년(숙종33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세웠고 향사를 올리며 선생을 추앙하게 되었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0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도계서원 앞에는 1980년 전국 국어국문학 시가비 건립동호회가 세운 노계가비가 있다. 앞면에 노계가 1636년 76세 때 은거지인 경주 산내 노곡의 경치를 노래한 가사 「노계가」가 새겨져 있다.

 

  도계서원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노계집(蘆溪集)』 판목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서원 앞의 못 건너편에는 노계 선생의 묘가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상세정보

 

►주소 : 경북 영천시 북안면 신평탑골길 93-33(북안면 도천리 297-1)

►전화 : 054-338-8391

►관람 : 10:00 ~17:00 (관람료 : 없음)

►휴관 : 월요일, 1월 1일, 설 당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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