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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이원수문학관, 창원에 선 「고향의 봄」작가 이원수문학관

by 혜강(惠江) 2022. 3. 28.

 

이원수문학관

 

창원에 선 「고향의 봄」작가  이원수문학관

 

 

글·남상학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이원수의 「나의 살던 고향」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나의 살던 고향」을 읊조리며 고향을 찾아가듯 남쪽 나라 창원으로 향했다. 「나의 살던 고향」, 「찔레꽃」, 「어머니」 등 주옥같은 작품으로 근대 어린이문학을 발전시키고 문화 운동에 앞장선 이원수의 문학관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나의 살던 고향」은 1935년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로 온 국민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 이 노래의 노랫말은 아동문학가 이원수(李元壽, 1911~1981)가 쓴 동시였다. 1907년 방정환 선생이 창간한 어린이 잡지 『어린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어린이』 잡지 35호(1926년)에 실린 작품이다.

 

 

 

  이 동시는 물론 자기 고향을 그리며 쓴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 경술국치 이전의 조선을 그리워하며 조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민족 고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지식인의 심정이 잘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원수문학관은 아동문학가인 이원수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향의 봄」 창작 배경지인 경남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에, 2003년 12월에 개관했다. 창원 천주산과 소답동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남산 정상에 자리한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 1층에 마련되었다.

 

 

 

  면적 181㎡ 규모의 문학관에는 선생의 생전의 활동 모습, 작품 「고향의 봄」의 배경지 설명,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저서와 자료들, 만년필, 안경집, 담뱃대 등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원수는 양산에서 태어났으나 이듬해인 1912년 창원으로 이사하여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그 후 마산으로 이주하여 마산 공립보통학교(현 마산상고)에 다녔다.

 

  6학년 때인 1926년, 그는 창원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추억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 「고향의 봄」에 담아냈고, 「꼬마 옥이」, 「5월의 노래」, 「겨울나무」, 「찔레꽃」 등 많은 작품에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모르게 가만히 먹어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이원수의 「찔레꽃」

 

 「찔레꽃」은 1930년 『신소년』에 실렸던 작품으로, 1979년 동시집 『너를 부른다』에 수록할 때 ‘언니’를 ‘누나’로 바꾸는 등 내용 일부를 고친 것이며, 많은 사람이 개사하여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거기에다 너나없이 먹는 일 자체가 힘들었던 시절, 찔레 순이나 아카시아 새순 껍질 벗겨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던 보릿고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함안 금융조합에 다니던 중 1935년 반일독서회 모임인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다시 함안 금융조합에 복직되어 8·15광복까지 근무했다.

 

  이 무렵, 그는 세 살 아래인 최순애와 7년간의 펜팔 왕래 끝에 결혼했다. 최순애는 11살 어린 소녀 시절에 이원수의 「고향의 봄」보다 먼저 「오빠 생각」이라는 시를 써서 『어린이』 지에 발표한 바 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뚤귓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최순애의 「오빠 생각

 

 

 

  너무나도 친숙한 동요인 「오빠 생각」의 최순애, 「고향의 봄」의 이원수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 이 뮤지컬은 이원수, 최순애 부부가 어린 시절 동시를 교류하며 사랑을 꽃피웠던 일화와 한국전쟁 시기에 세상을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꼬마 옥이」라는 동화를 썼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함안금융조합에 복귀한 후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늘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살다가 친일 시들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평생 큰 멍에가 되었다.

 

  이원수문학관에는 ‘일제 말기 친일 작품’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과 친일시도 붙여 놓았다. “(이원수는)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하여 다니던 때인 1942년 8월에 조선금융여합조합회의 국책기관지 『반도의 빛』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 글을 남겼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소리는 하늘에 찼네.” (후략)      - 「지원병을 보내며」

 

 

 

  이 외에도 이원수는 1943년에 쓴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 「고도의 감회-부여신궁어조영(扶餘神宮御造營) 봉사작업에 다녀와서」 등을 발표하는데, 이 역시 친일 작품에 속하는 글로서 그는 친일파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시물에는 친일 시를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에 대하여 그는 변명인지 해명인지 다음과 같이 썼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 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이원수 「털어놓고 하는 말」(1980)

 

  기념관 측은 여기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의 신변이나 가정 경제에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친일 글을 썼다는 것은 민족에게 죄를 지은 일이었으며, 그의 활동과 정신에 큰 오점을 남긴 일이었다.” 이처럼 이원수문학관은 그의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8·15광복 후에는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로, 1946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도 가입하여 문학 활동을 했다.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이 되어 1947년 『종달새』, 1948년 그림동화집 『봄 잔치』를 출판하고, 1952년 『소년 세계』를 창간했다. 또 1953년에는 장편 동화 『숲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를 발표했다.

 

 

 

  종전 후 1954년 그는 한국아동문학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을 지냈고 1956년에는 『어린이 세계』라는 아동 월간지를 창간해 주간을 지냈다. 1962년에는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출간했고, 1965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동화집 『파란 구슬』, 『민들레의 노래』, 『빨간 열매』, 『잔디 숲속의 이쁜이』, 『눈보라 꽃보라』, 『불꽃의 깃발』, 『꼬마 옥이』, 『너를 부른다』 등을 출판했고, 1971년 회갑을 맞아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간행했다.

 

 

 

  그는 한때 친일적인 작품을 쓰긴 했으나 외재율 중심의 재래적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 참여적 동시를 개척하고 산문문학으로서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을 쓰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통한 아동문학 확립에 이바지하는 등 문학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한국 아동 문학가협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는 동안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8), 대한민국 문학상(1980)을 받았다.

 

 

 

  70세에 1981년 구강암으로 사망하여, 유해는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82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창원에 ‘이원수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사후 22년 뒤인 2003년 12월의 일이다. 1984년에 이원수의 문학 전집(전 30권) 출판되었다.

 

  1968년에 마산 산호 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1981년 서울 어린이 대공원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의 사후 2011년 유족들이 이원수의 친일행적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상세정보

 

▻주소 : 경남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135번길 32 (서상동 산 60)

▻전화 : 055-294-7285

▻관람 : 화~금요일 :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요일 : 오전 9시~오후 5시

▻휴관 : 매주 월요일, 살날과 추석 연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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