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한글), 세계 역사에 빛나는 세종의 위대한 업적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자, 훈민정음 (한글)
세계 역사에 빛나는 세종의 위대한 업적
글·사진 남상학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애민 사상과 조선의 자주적인 문화를 보호하고자 한 강력한 비전이 결합된 창조물로서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바탕으로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글은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문자 발명의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지식과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 되었으며, 새로운 문화 발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자, 세종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의 재위 시기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훈민정음의 뜻, 다른 이름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지금 한글의 원형이다.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반포된 초기에 정음(正音)'으로도 불리었고, 그밖에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면서 양반들에 의하여 홀대받았다. 지금 사용하는 ‘한글’이란 이름은 ‘바르다·크다·하나·으뜸’이라는 뜻에서 ‘한글’이라 고치어 부르고 있는데, 주시경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목적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은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우리말은 중국 말과 달라서 한자를 가지고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고, 우리는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이런 어려움을 근본부터 극복하기 위해 백성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우리의 고유 문자로서 이 창제되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현대어 번역)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창제·반포 연대
세종대왕이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하여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하였다. 창제 후 3년이 지나 반포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한글 창제가 조정에 알려지자 1444년 2월 20일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들의 주장은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당시 사용하던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이에 세종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는 실제 궁중에서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는 동시에,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의 창제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을 상세히 알릴 수 있는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등 보완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최만리는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 격이었는데, 이에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친국을 당한 뒤, 투옥되었다.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훈민정음의 구성과 특징
훈민정음은 초성과 종성에 쓰이는 자음 문자 17개와 중성에 쓰이는 모음 문자 11개를 통틀어 28개의 자모로 구성된 글자이다. 훈민정음 28자모의 제자 원리는 상형(象形)에 있다.
먼저 초성의 기본문자인 ‘ㄱ, ㄴ, ㅁ, ㅅ, ㆁ’의 다섯 문자는 각 문자가 발음될 때의 발음기관(어금니, 혀, 입술, 이,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즉,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 모양, ‘ㅅ’은 이 모양,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떴다. 여기에 획을 더하거나 같은 자음을 하나 더 쓰거나 모양을 달리하여 모두 17개의 문자(‘ㄱ, ㅋ, ㆁ’,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ㅊ, ㅅ’, ‘ㆆ, ㅎ, o’, ‘ㄹ’, ‘ㅿ’ 가 만들어졌다.
또, 중성은 기본문자인 ‘아래아(ㆍ), ㅡ, ㅣ’는 각각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본뜬 것으로, 아래아(ㆍ)와 ‘ㅡ, ㅣ’를 위아래와 좌우로 한 번 또는 두 번 어울리게 하여 모음 문자 11개(ㆍ,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가 만들어졌다.
그중 초성의 3자(ㆁ, ㆆ, ㅿ), 중성의 1자(ㆍ) 합하여 네 글자는 오늘날 쓰이지 않고 24자만 쓰이고 있다. 특히 오늘날 쓰이고 있는 초성 ‘ㅇ’은 ‘ㆁ’ 글자인 것인데, 편이상 꼭지를 떼어 내버리어 종성으로 쓰일 때는 ‘ㆁ’의 소릿값을 갖게 하고, 초성으로 쓰일 때는 ‘ㅇ’의 소릿값을 갖게 했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28자 이외도 병서(並書)와 연서(連書)가 있어서 글자의 수효는 훨씬 많았다. 문자 체계는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삼분(三分)하는 낱소리 글자(음소문자)로서, 특기할 것은 성조(聲調)를 표시하는 방점까지 가지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문자는 소리글로서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반영하여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다.
▲자음 체계도
▲모음체계도
●훈민정음 보급을 위한 세종의 의지
사대부들의 훈민정음 반대기류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 보급을 위한 세종의 의지는 강력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인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했으며, 신숙주·성삼문·최항·박팽년에게 송(宋) 이후의 중국 음운의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고금운회』의 번역을 명했다. 또.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 등 편찬사업을 진행하여 훈민정음의 보급에 힘썼다.
또, 세종은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도록 하였고,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했고,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刑律)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 이러한 훈민정음 보급 정책에 따라 훈민정음은 점차 퍼져 나갔다.
훈민정음은 무엇보다 한자에 비하여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웠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가 되었다.
●훈민정음(한글)의 우수성
한글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들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다. 한글은 그 창제 정신이 '자주, 애민, 실용'에 있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창제 정신과 더불어 제자(制字)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에 있어서도 뛰어나며, 적은 수의 글자로 많은 소리를 적을 수 있다. 따라서 쉽고 빨리 배울 수 있으며, 컴퓨터, 휴대 전화 등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다.
이러한 한글의 특성은 국제 기구에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을 주고 있다. 이 상의 명칭이 세종대왕에서 비롯된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 문맹자를 없애기에 좋은 글자임을 세계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글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를 보면, 에두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는 “한글은 세계 어떤 나라 일상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 체계다.”라고 했고, 제프리 샘슨 영국 서식스대 교수는 “한글이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지적 성취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으며, 재러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저자는 “한글은 독창성과 기호 배합 효율성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또.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펄벅은 "한글은 24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문자 체계이지만, 한글 자모음 글자를 조합하면 어떤 언어 음성이라도 표기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훈민정음의 의의와 가치
이처럼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글자를 가져야겠다는 자주성에 기인한 것으로 새로운 문자 체계의 발명으로 조선 시대 서민들에게 문자의 문턱을 낮추어, 사회 전반에 걸쳐 문맹률을 감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학문, 사회적 소통력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식의 확산을 촉진하고, 문화 발전에도 일조하였다.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는 단순한 문자 발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회적, 문화적 업적이다.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오늘날 한글은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훈민정음은 현대 한글의 기초가 되었으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글날(10월 9일)을 통해 그 가치를 기리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와 한글의 미래 가치는 대단하다. 한글은 간결한 음소문자로 컴퓨터와 디지털 기기에서도 표현이 용이하여 정보화 시대에도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간단한 구조 덕분에 타 문자와 비교해 빠르게 타이핑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성 덕분에 디지털 시대에서도 그 효율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대화 과제와 전망
우선 한글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있어서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을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외래어의 남용, 청소년들에게서 유행하는 조악한 신조어(新造語), 약자 등 사용을 막아야 한다.
한편,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한글에도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앞서, 한글의 미래와 가치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크게 부각되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및 모바일 기기의 출현으로 텍스트 메시지 및 이모티콘에서 한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더욱 연구해야 한다. 이와 아을러 기술적 발전과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한글의 글자 인식 소프트웨어 및 음성 인식 기술과 같은 혁신이 더욱 필요하다.
우리가 한글날을 기리는 것은 단순히 세종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순수성을 지키며, 이를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는 노력이 함께 요구되는 이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