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25세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발자취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25세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발자취
글·사진 남상학
지난 가을 찾았다가 리모델링 관계로 관람하지 못하고, 몇 번 벼르다가 뒤늦게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았다. 5월이지만 날씨는 어느덧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매헌기념관)은 애국 애족의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나라에 헌신한 매헌 윤봉길 (梅軒 尹奉吉, 1908~1932) 의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윤봉길 의사 의거 56주년인 1988년 12월 1일 서초구 양재시민의숲 내부에 건립되었다.
건립 초기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해 운영하였으나, 2016년부터는 국가보훈처 소속으로 이관돼 2년 후인 2018년에 현대화된 시설로 재개관하였다. 그리고 2020년 6월 23일에는 기념관이 박물관으로 공식 등록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되었고, 2024년에 들어서 전시관 내부 수리를 거쳐 전시실을 새롭게 단장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 동상과 숭모비
양재시민의숲에 자리 잡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기념관 좌측 공원에 매헌 윤봉길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매헌 윤봉길이 쓴 한시 「학행(學行)」을 번역한 시가 적혀 있다.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선비의 기개 맑고 만고에 빛나리/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그 모두가 학행에 있으니 그 이름 스러짐이 없으리” 이 시비는 만고에 빛날 선비의 기개는 ‘학행’에 있음을 일러준다.
시비를 지나면, '천추의열 윤봉길 의사 숭모비'(1993년 건립)가 있다. 이 숭모비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 일본군 총사령관 등 군 수뇌 7명을 사상케 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주어 전의를 상실케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성과를 올린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널리 알리고, 그의 나라 사랑과 인류의 자유, 평등, 평화를 사랑하는 그의 정신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상해 의거 제61주년을 맞아 세웠다.
또 곧바로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높이 9.2m의 '매헌 윤봉길 의사 동상'(1992년 건립)이 우뚝 서 있다. 동상 한쪽에는 '이 은혜 길이길이 우러러보리'(斯恩寔瞻)라는 글귀가, 다른 쪽엔 '홍구공원에서 푸른 풀을 밝으며'라는 제목의 그의 유시(遺詩)가 새겨져 있다.
'처처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 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1932년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인 간담을 서늘케 한 의거 이틀 전(4월 27일) 현장을 답사하며 지은 시다. 5월 신록과 어울려 운봉길 의사의 기개가 푸른 하늘 위로 높다. 주변 숲속에도 윤봉길의 시가 적힌 팻말이 있어서 산책하며 감상하기 좋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둘러보기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대지 6,587㎡에 건평 2,452㎡,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에 이르는 규모를 갖추고 우람하게 서 있다. 1층은 주요전시공간인 중앙홀과 제1~2전시실과 디지털영상실, 물품보관함, 수유실, 뮤지엄샵, 사색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2, 3층에는 기획 전시실, 세미나실, 사무실, 강당, 교육실, 회의실이 있고, 지하 1층에는 수장고, 자료실, 매헌 연구실, 숙직실, 기계실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중앙홀
내가 방문했을 때는 중앙홀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동상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설전시를 축약하여 담은 이동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억 상자’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기억 상자는 다음과 같이 4부로 나누어 주요유물과 내용을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관련 기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0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공화정의 시작 / 02, 대한민국 뿌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 03. 그대들 돌아오시니, 환국 / 04.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
◎제1전시실
중앙홀을 둘러보고 제1전시실로 들어서면,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성장부터 칭다오 생활까지의 과정을 유물, 자료, 영상으로 보여준다.
►충남 덕산에서 태어나다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1932년 12월 19일)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2세(1919년)에 일본인 교육을 거부하며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14세부터 19세까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과 한시, 신학문, 신사조 등을 공부하였다. 19세 때 스승 성주록은 윤봉길에게 “나로서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라며, 석별 기념으로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해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오치서숙을 나온 후에도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홍주의병의 항일정신을 배웠다. 윤봉길은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아일보』와 민족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이 코너에는 윤봉길 의사의 연표, 가계도, 생존 당시 사용했던 생활 유품과 윤 의사의 300여 편 시문 중에서 주요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서다.
1926년 윤봉길은 농촌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윤봉길의 나이는 19세였다.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봉길은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 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 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고취를 목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시행했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와 증산 운동, 공동판매 공동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국산품 애용과 일화(日貨) 배척,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 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양성하였고, 위친계(爲親稧) ·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윤봉길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은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야학회로 인한 투옥과 광주학생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상을 보면서 이러한 운동은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 자 일기에 윤봉길은 “함흥 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넣기도 했다. 이는 윤봉길이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코너에는 20세에 저술한 「농민독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농민독본」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정신적 교과서다. 유명한 ‘생명 창고 사상’도 농민독본에 있다.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 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 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농촌 계몽운동을 추진했던 부흥원에서는 ‘농민독본 검색하기’ 체험과 연극 ‘토끼와 여우’ 영상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주요 유묵 작품, 가족에게 보낸 편지 등 윤봉길 의사의 유년기에서 칭다오 생활까지의 농촌운동가에서 독립운동가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제2전시실
제2전시실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의 다양한 활동과 생활상, 상하이 의거, 순국, 유해 봉환, 상하이 의거의 의의와 영향, 추모에 관한 내용이 유물과 자료, 2D, 3D, 투명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영상기법으로 현장감 있게 연출되어 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드디어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윤봉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봉길에게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이었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에서 인삼장사, 모자공장, 채소 장사, 등 역경의 생활을 하면서도 상하이와 국제정세를 꾸준히 살피며 독립운동의 열정을 키워갔다.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은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백범 선생과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 리 먼 길을 달려온 윤봉길이었다. 윤봉길과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보도를 접한 윤봉길 의사는 거사를 결심했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거사를 위한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루쉰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했다.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金弘壹)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 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의 모습이었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고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가와바타와 시게미쓰 사이에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 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상하이 의거, 독립의 초석으로
윤봉길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한 것이며, 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체포된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을 거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라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은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25세로 생을 마친 그는 거사를 며칠 앞두고 강보에 싸인 사랑하는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보낸 유언을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이 유언은 그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마도 이 유언은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는지도 모른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기념사업
윤봉길 의사는 꽃다운 나이에 자기 목숨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바꾼 인물이다. 그는 조국의 아름다운 ‘꽃’이었고, 참된 ‘빛’이었다.
"당신이 던진 것은 사나운 폭탄만이 아니다 / 꽃이 던져졌고, 빛이 던져졌다 / 아픔이 던져졌고 사랑이 던져졌다 / 당신이 던진 꽃과 사랑은 / 우리들의 가슴만을 뜨겁게 만든 것이 아니다. / 원수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고 우리가 누군지 모르던 / 온세계의 착한 사람들의 그 가슴도 뜨겁게 만들었다."
이 시는 시인 신경림의 「당신이 던진 폭탄」 전문이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알리고 나라 사랑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자 매년 12월 19일, 서거일을 맞아 순국 추모 행사를, 매년 4월 29일에는 4.29 상하이 의거 기념식을 거행하며, 이외에도 탄신기념음악회, 국내학술회의, 매헌 문화강좌, 매헌 수요강좌, 독립영화감상, 역사문화탐방 등을 실시하고 있다.
◎관람 정보
주소 : 서울 서초구 매헌로 99 (양재동 236), 양재시민의숲 / 전화 : 02-578-3388
운영 : 10:00~18:00, 매주 월요일 휴무/ 5월 5~6일 정상 운영, 5월 1일, 7일 휴관
입장료 : 무료 / 주차요금 : 300원/10분 // 대중교통 :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 숲(매헌)역 5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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