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섬 전체가 박물관이다. 하늘이 열린 땅, 마니산 참성단으로부터 160여 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 몽골족의 침입에 맞서 싸운 대몽항쟁의 중심인 '고려궁지', 부처의 힘을 빌어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바란 '팔만대장경',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왕실의 피난처로서 곳곳에 '5전 7보 53돈대, 영원한 제국을 꿈꾼 정조대왕이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외규장각 등이 이곳 강화에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 병자호란과 구한말 서구 열강의 빈번한 외침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강화도는 한 마디로 국방의 보루였다. 강화도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드넓은 갯벌과 해안 풍경, 그리고 낙조의 아름다움까지, 강화가 품고 있는 풍경과 지금까지 살아온 강화의 역사 이야기는 광활한 갯벌만큼이나 끝이 없다. 섬이긴 하나 수도권에서 지척일 뿐 아니라 강화대교나 초지대교를 건너면 쉽게 갈 수 있는 강화도, 그 강화도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보자.
단군의 유적을 찾아가는 여정
► 민족의 영산, 마니산
강화도 마니산(472.1m)은 한 민족의 얼이 서린 명산이다. ‘마리산’, 또는 ‘머리산’으로도 불린다.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를 뜻하며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의미한다.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 먼 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꼽힌다.
그 중간 봉우리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남한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단군 유적인 이곳은 국가 사적 제136호로 지정돼 있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제단의 하단은 하늘을,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 참성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개천절에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 성화를 채화하는 성스러운 장소다.
정상까지 가는 탐방로는 2개 코스. 계단로는 왕복 4.8km로 짧지만 1004계단을 오르는 게 쉽지 않다. 단군로 코스는 왕복 7.2km로 제법 길지만 걷기에는 무난하다. 1시간 30분에서 2시간가량 걸으면 정상 부근 참성단에 도달한다.
서해를 조망하며 동남쪽으로 뻗은 암릉을 따라 내려오면, 중턱에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희정선사가 창건한 정수사와 함허동천이 있다.
►꽃살문이 아름다운 정수사과 함허동천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선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후 이곳 지형을 보고 불자가 가히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기 합당한 곳이라 여겨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창건할 때 정수사(精修寺)라 했던 것을 조선 세종 5년(1423) 함허대사가 중창하고 법당 서쪽의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정수사(淨水寺)’로 고쳤다.
108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정수사는 단정한 아름다움으로 방문객들을 사로잡는다. 대웅보전은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다. 무엇보다 대웅보전의 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문이다.
강화읍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함허동천을 지나 2km쯤 달리면 정수사 돌비석이 보이고, 입구부터 절집까지는 1km 남짓, 걷기에 충분한 거리다.
함허동천은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 해서 그의 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져 산세가 빼어나고, 항상 맑고 깨끗한 기운이 가득하다 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많다
► 전등사, 삼랑성에 둘러싸인 호국사찰
정수사에서 그리 멀리 않은 길상면 온수리에 전등사가 있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일명 정족산성) 지나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 전등사가 얼굴을 드러낸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그 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 공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傳燈寺)로 개명했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대웅전의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나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자비를 베푼 도편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인즉, 불사에 참여한 도편수가 마을의 주모와 사랑에 빠졌다. 공사를 마치고 혼인할 생각으로 모아둔 돈을 모두 맡겼는데,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편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찾아 나서는 대신 대웅보전, 네 귀퉁이에 그 형상을 새겼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중요 유물로는 범종과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 상 일괄이 모두 전등사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 터가 복원되어 있다.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병인양요 때 전등사로 옮겨 조선실록과 서적을 토굴에 보관해 왔다. 또한, 전등사 동문 입구에는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승군 50명을 지휘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이로써 전등사는 호국사찰로서 굳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찰 경내에는 전등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고 긴 세월 풍상과 역사의 상처를 안고 오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선사시대의 유적 찾아가기
►부근리지석묘(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세계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돌을 고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고인돌은 흔히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당시 고인돌은 지배층의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인돌에는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의 두 가지가 있다. 강화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고인돌)는 2~3천 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의 기념물로 선사시대의 문화와 기술,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지난 2000년 전남 화순, 전북 고창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도에는 주로 고려산 기슭에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흩어져 있는데, 고인돌 공원 한가운데에 1기가 서 있다. 일명 부근리 고인돌로 불리는 이것은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다. 높이 260cm, 뚜껑돌은 길이 650cm, 너비 520cm나 되는 거석이고, 그 밑에 2매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크기와 세련된 조형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로서 당당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북방식 형태를 보여주는 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를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강화도에는 부근리 고인돌 외에도 강화읍, 송해면, 내가면에 걸쳐 고인돌군이 있는데, 고려산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 평탄한 지대에 약 20∼30기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 강화의 역사가 있는 곳, 강화역사박물관
고인돌 공원 바로 옆에 강화역사박물관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 · 현대까지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 중심으로 강화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이다. 2개 층으로 구성된 강화역사박물관은 2010년 개관하였으며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을 비롯하여 영상실, 강당, 뮤지엄 샾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췄다. 역사를 시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둘러보려면, 매표소에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 선사시대를 먼저 살펴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고려와 조선 시대를 차례로 둘러보는 것이 편리하다.
2층에는 상설 유물전시실과 체험관이 있다. 상설 유물전시실은 구석기부터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나는 청동기 시대 탐험과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등 강화의 역사를 체험해보고 익힐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공간이다. 스크린을 통해 퀴즈와 퍼즐을 풀어볼 수 있고, 참성단의 선녀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다.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는 그림자 연극을 보여준다. 바닷길을 통해 고려청자를 필리핀으로 보내야 하는 강화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밖에 고려산 오련지, 전등사 나녀상, 손돌, 보문사 석실 나한상 등 강화에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구성해놓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1층은 고려. 조선 시대 등 근·현대의 강화 유물과 민속사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 강화도 수난의 역사, 조선 시대 말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발생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가슴 아프지만 잊어선 안 될 역사적 사건들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딱딱한 역사가 아닌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역사의 현장이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이 열린다. 그리고 강화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실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 강화자연사박물관
강화역사박물관이 강화에 사는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강화자연사역사관은 인간과 공생해온 자연의 역사를 보여준다. 2015년 11월 개관한 자연사박물관은 4,888㎡의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2층, 총면적 2,712㎡ 규모이다.
우선 로비에 들어서면 향유고래의 골격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2009년 1월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에서 좌초된 고래를 해체, 건조하여 골격을 제작한 후 전시한 것인데, 발견 당시 전체 길이가 무려 14.5m, 무게는 20t이었다고 한다. 전시실에는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광물, 생물 표본 및 화석을 소장하고 있다.
고려 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흥궁이 있다. 용흥궁은 사도세자의 직계후손인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철종 4년(1853)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었다.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면서 강화도령으로 불렸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는데,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흥궁도 원래는 보잘것 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지금과 같은 집을 지었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었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강화전쟁기념관은 갑곶돈대 내에 있다. 강화전쟁기념관은 4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주제관으로, 돌화살촉, 고리자루칼 등을 전시하였다. 제2전시실은 고려 시대의 철제은입사 투구, 철투구, 철도자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 걸고 싸웠던 깃발인 수자기와 면제 갑옷 등을 볼 수 있다. 제4전시실에는 조선 시대 주력 화포인 불랑기포, 항일 의병들이 사용한 화승총 등 근현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밖에도 항일 의병을 체험하는 코너와 포토존도 있다.
이곳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역사의 고비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호국정신을 드높이는 듯 우람하게 서 있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설날을 제외하고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나 야외공원은 연중무휴 언제나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