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호수공원과 김종삼 시비(詩碑)
고모호수공원
고모호수공원과 김종삼 시비(詩碑)
글·사진 남상학
국립수목원에서 2시간에 걸쳐 숲속 산책을 마치고, 고모호수공원으로 향했다. 고모호수공원은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호수공원이다. 먹고 즐기며, 누구나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본래 주변 죽엽산(해발 601m) 등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막아 포천평야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저수지였다. 그러나 농경지가 산업지로 변모함에 따라 호수 주변은 저절로 자연공원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모호수공원’으로 바뀌었다.
고모호수공원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들어서면, 고모저수지 수변공원 안내도와 둘레길, 고모3리 상가지도 등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적혀있는 고모리 명칭의 유래가 재미있다.
어떤 사람이 고모님을 모시고 산밑에 살았는데, 이 할미가 외로이 세상을 떠난 뒤, 이 할미를 매장한 묘 앞이라 하여 이곳을 고뫼 앞 또는 고묘, 고모리라 불리다가 마을 이름이 ‘고모리’로 정해졌다고 한다.
바로 앞, 넓은 공간이 고모호수공원 광장이다. 이곳이 첫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공연을 펼칠 수 있는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매주 주말과 공휴일에는 아마추어 동아리팀이 순차적으로 예술 공연을 펼치고, 프리마켓이 열려 주민이 직접 만든 수제품이나 농산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공원 입구와 호수 주변에 세워진 상징물들에서 그 흔적이 오롯이 엿보인다. 주민들은 호수공원을 찾는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호수공원' 상징물을 세웠다.
나뭇잎 모양 ‘고호수공원’ 상징물은 500년 동안 온전한 자연의 모습으로 보존된 원시자연림인 국립수목원을 의미하고, 원형은 맑고 푸른 호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광장 한쪽에는 마치 선사시대의 고인돌을 닮은 시비가 있다. 바로 김종삼 시인의 시비이다. 김종삼 시인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보통학교,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요시마 상업학교를 졸업,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월남하였는데, 왜 김종삼 시인의 시비를 이곳 포천에 세웠을까 궁금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시비에서는 그 이유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
이 시비는 조각가 최옥영이 만들고, 서예가 박양재가 글씨를 썼는데, 우리나라 시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비로 평가받는다. '김종삼 시인의 시비'라고 적힌 원형의 윗돌이 그의 대표시인 <민간인>이 새겨진 윗돌 위에 놓여 멋진 형태를 이루고 있다.
"1947년 봄 /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이 시는 『김종삼전집』(2005, 나남)에 실려있는 <민간인> 전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공포, 힘없는 사람들의 비참한 참상을 참혹하게 그려낸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바다 위, 혹여 발각될까 우린 어린아이의 숨을 끊어야만 했던 그 참혹한 모습이 ‘황해도 해주 용당포’라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사실감을 더해 준다.
이 시비는 1993년, 시인의 사후 9년 후에 그를 따르던 후배 시인 등이 주축이 되어 39인의 동료 문인과 조각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 시비는 수목원 인근의 '가든수목원' 식당 정원 길가에 세워졌으나 국립수목원 측에서 주차장과 안내센터 조성을 위해 식당 부지를 사들임으로써 시비도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주민자치위원회 이제승 위원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지역 유지들과 유족들을 설득하고, 포천 시청의 이전 경비 지원을 받아 2011년 지금의 고모호수공원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주민들의 노력이 시비를 지켜낸 것이다. 주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고, 포천 문화관광과에 질의하여 종합해본 결과, 포천은 김종삼 시인의 부모가 살았으며, 이곳에서 가까운 포천 부인터 공동묘지에 김 시인의 ‘부모의 묘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시에도 ‘부인터’라는 지명이 언급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라는 시에서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처절하게 표현했다.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았다
그것들 때문에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아우는 비명에 죽었고
형은 64세 때 죽었다
나의 불치의 지병으로 여러 번 중태에 빠진 곤 했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에 남길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도 못썼다고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이렇게 김 시인이 최후로 그리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계신 곳이 포천 땅인 부인터 공동묘지였다. 그래서 포천은 김종삼 시인에 있어 그의 영혼의 마지막 고향인 셈이다.
『김종삼 시인은 1947년에는 극단 극예술협회 연출부에서 활동했다. 1953년 『군 다이제스트』 편집부에서 일하면서 『신세계』에 시 「원정(園丁)」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57년 김광림‧전봉건과 함께 3인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펴냈으며, 1968년 김광림‧문덕수와 함께 3인 시집 『본적지』를 펴냈다. 첫 시집 『12음계』(1969)를 간행한 이래 『시인학교』(1977),『북 치는 소년』(1979),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평화롭게』(1984) 등을 간행하였다. 약 200편의 시를 남겼다.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4년 사망하였다.
김종삼은 이른바 1950년대 시인으로서 특히 한국전쟁 체험에서 비롯된 전후의식을 공소하지 않은 미학으로 형상화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성스러운 평화의 세계를 끊임없이 갈망하면서 전개되는바, 초기 시에서는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대상이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 음악의 세계가 노래된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북치는 소년」에서 강조되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중기에 오면 ‘돌’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면서 고통과 죽음의 세계를 노래한다. 후기시에서는 지상의 삶에 대한 연민 어린 애정이 어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시비를 지나쳐 고모저수지둘레길(2.6㎞)로 접어든다, 시원하게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둘레길 난간에는 김종삼 시인의 시를 적은 패널이 걸려 있어 찬찬히 시를 읽으며 걸으면 좋다, 마치 호수 위에서 펼쳐진 시화전에 와 있는 듯하다. 잔잔한 호수와 초록의 신록이 자연스럽게 시화전의 배경이 되어 준다.
저수지 중앙에는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4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휴일에 한하여 12시부터 17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분수쇼를 볼 수 있다. 분수쇼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처럼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도 있지만 이곳 저수지 역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유람선과 모터보트, 오리배 등도 마련돼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보트도 정겹다.
뿐만 아니라 공원 주위에는 펜션과 카페, 식당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나들이 온 가족과 연인이 들리기 좋다. 한 바퀴를 다 돌면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특히 고모호수공원은 광릉숲 생물권보전지역둘레길의 8코스에 해당하는 ‘고모리길’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수도권 나들이 장소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말에는 나들이 차량이 몰려 주차하기 힘든 것이 흠이다. 주변 음식점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주차하고 둘러볼 수 있다.
►공원 안내
주소 : 경기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678-1
관람 시간 : 제한이 없음
입장료 : 무료 (유람선 탑승은 요금 별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