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유서 깊은 수덕사와 덕숭산 오르기
예산 수덕사 ·덕숭산
충남의 유서 깊은 수덕사와 덕숭산 오르기
- 만공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 가득 -
글·사진 남상학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수덕사(修德寺)는 인근에 있는 덕산온천이 일찍이 이율곡이 ‘탁월한 약수’라고 소개한 적이 있고, 조선시대 순조 때의 기록에도 덕산온천에 많은 탕치객(湯治客)이 모여들었다는 글이 있을 만큼 인근의 덕산온천이 잘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천에 왔다가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진 수덕사를 방문하곤 했다.
필자도 몇 차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꽃샘추위가 풀리고 봄기운이 완연한 날 아내와 함께 나들이 코스로 덕숭산(德崇山)을 오르기로 하고, 덕숭산 자락에 안긴 수덕사를 다시 찾기로 했다.
특히 수덕사 밑에는 한때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이응로(李應魯, 1904.1.12~1989.1.10) 화백을 찾아 드나들던 수덕여관이 있고,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 수덕사에 머물던 동갑내기 친구 김일엽(金一葉, 1896~1971) 스님을 찾아와 수덕여관에 머물며 나눈 대화들이 많은 흥미를 자아내는 곳이 아니던가.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매표소를 들어서서 조금 오르면 금강문이 나오고, 왼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걸으면 김일엽 (金一葉) 스님의 거쳐였던 환희대(歡喜臺)가 있다. 비구니들이 기거하며 수도하는 암자다. 이 암자에서 일엽 스님이 기거하다가 열반했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환희대와 원통보전 그리고 보광당이 있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속세에서 신여성 문필가로 날리던 김원주(金元周)였다. 1920년에 문학 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성」을 간행하기도 했다. 1933년 수덕사에 입산하여 만공(滿空)의 제자가 되었다. 1962년에는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를 출간했다.
금강문에서 곧바로 올라가면 사천왕문이다. 사천왕문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견성암이다. 그리고 사천왕문에서 곧바로 올라가면 2층 누각인 황하정루가 있다. 황하정루 지하에는 근역성보관(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통로를 따라 축대 위로 오르면 국보 제 49호인 대웅전에 이른다.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적인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건립되었으며,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몇 번의 보수를 거쳤으나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불단에 모신 삼존불은 금당(金堂)의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인다. 1938년 만공(滿空) 스님이 전북 남원 귀정사에서 옮겨 왔다. 현재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 과거불인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미래불 아마타불이 좌정하고 있다. 삼세불(三世佛) 양측에는 두 분의 협시보살상(挾侍菩薩像)이 배치되었다. 수덕사 괘불(掛佛)은 보물 제1263호이다. 조선 현종 14년(1673) 4월에 수덕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노사나불(盧舍那佛)이 그려져 있다.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를 말한다.
여러 전각들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측에 명부전이 있고, 대웅전 앞쪽 아래 좌우에 백련당과 청령당이 있다. 또한 대웅전 아래 백령당, 청령당 앞 가운데에는 3층 석탑이 있고, 백련당 아래쪽에는 범종각이 있다.
그리고 청령당 아래쪽에는 법고각이 있다. 그 뒤로는 종무소로 사용하는 조인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 앞뜰에 있는 3층 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수덕사를 둘러보고 그 뒤로 난 산책길을 오르면 곧장 덕숭산으로 이어진다.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은 높이 495m로 일명 수덕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수덕사의 명성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부터 호서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세를 가지고 있어, 1973년 3월 6일 가야산(伽倻山, 678m)·석문봉과 함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으나 절묘한 형상을 지닌 기암괴석들이 산자락에 포진해 있어 산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인가 하면 원효봉과 석문봉, 해태바위 등은 덕숭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대웅전에서 1천 20 개의 돌층계를 따라 정혜사로 이어지는 산책길은 고요한 사색의 공간으로 나무랄 데 없다. 울창한 숲 속으로 이어진 돌길을 오르면 또 가파른 5백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곳곳에는 관음불상, 만공탑, 아담한 암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옛날 경허(鏡虛)와 만공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덕을 숭상한다는 산의 의미가 느껴진다.
등산로를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우측 바위 벼랑에 앙증맞게 앉은 소림초당(小林草堂)이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볏짚으로 새로 이엉을 한 소림초당은 지금 무슨 용도로 이용되는지 모르나 아마도 수행을 위한 장소였으리라.
여기서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관음불상이 서 있고, 바로 그 옆에 향운각(香雲閣)이란 암자가 있다. 이것 역시 소림초당처럼 바위 절벽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있는데, 만공 스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덕숭산 정상에 오르는 이들은 보통 여기 관음불상 옆에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잠시 숨을 돌렸다가 발길을 옮기면 만공탑에 이른다. 만공(滿空, 1871∼1946)은 경허(鏡虛)의 제자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 불교계를 지킨 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속세의 성이 경허스님과 같이 송(宋)씨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도를 깨달고 경허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揭)를 받고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만공탑(滿空塔)은 제자들이 만공 스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현대식 부도이다. 형태를 보면 둥근 모양을 팔각기둥 셋이 떠받치고 있고, 그 아래에 팔각기단이 둘러져 있다. 상부의 구형 원상은 만공 스님의 사리를, 세 개의 팔각기둥은 불교의 삼보(三寶)를, 팔각기단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낸 것이다. 이 사리탑은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만공 스님의 제자였던 박중은에 의해 1947년에 세워진 것이다.
만공 대선사는 어릴 적부터 이적(異跡)을 몰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북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명이 바우였다. 아버지 송신통(宋神通)은 바우가 두 살 때 이런 예언을 남겼다. “이 아이는 속세에 살면서 세속의 일을 할 아이 같지가 않아…. 불문(佛門)에 들어 고승이 될 것 같아.” 신통하게도 이 말은 적중했다.
바우는 1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갔다. 금산사는 충북 보은의 법주사와 함께 우리 미륵신앙의 양대 중심지다. 미륵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후 56억7000만 년 후 사바세계에 강림한다는 분이다. 미륵불을 본 순간 바우는 기쁨에 들떠 소리를 지르며 부처님께 세 번을 절했다고 한다.
이후 바우는 어머니에게 금산사에 가자고 자주 졸랐다. 이유를 묻자 이러는 것이었다. “꿈에 미륵 부처님이 나타나 절 업어주셨어요.” 바우는 열네 살 때 출가해 태인 봉서사, 논산 쌍계사, 공주 동학사를 거쳐 서산 천장암에서 경허(鏡虛)선사와 조우한다. 한국 불교를 지킨 두 수호자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만공에 대한 일화 하나 -
하루는 함께 가던 중이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쫒아오는 바람에 힘껏 내달아 산을 올랐다. 나중에 그 중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질책하자 『그게 다 자네 때문일세. 그 바람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일화는 스승인 경허의 이야기라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에 어느 스님의 일화라도 무방할 것이다.
또 하나, 한 선화(禪和)가 어느 날 만공 노(老)선사를 모시고 불전에 서 있는데 노사(老師)께서 불상을 쳐다보며 이르시기를 “부처님의 젖통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 양식은 걱정 없겠다” 하시니 선화가 말하기를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노사께서 돌아다보시며 “무슨 소린 고!” 하시거늘 선화가 말하되 “복업(福業)을 짓지 않고 어떻게 그 젖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노사께서 이르시되, “저 사람이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은 먹지 못하는구나.” 하셨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에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조선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화하려 하자, 총독부 정책에 순응적이던 다른 주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일화
만공이 어떤 사미승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만공스님은 여기에서 꽉 막히고 말았다. 그 이후 이 화두를 들고 공부에 박차를 가했으며, 의심덩어리가 독로(獨露)하여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空)이 없어지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정진하여 새벽녘이 되자 어둠을 가르며 둥둥둥 새벽 쇠종소리가 울려왔다. 이 순간 미망(迷妄)의 경계가 벗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그 쇠종소리에 어두웠던 눈앞이 환히 열렸으며, 그 종소리가 혜안을 밝혀준 것이었다고 한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만공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더 오르면 정혜사 능인선원(定慧寺 能仁禪院)이다. 수덕사에는 현재 비구 선원인 정혜사 능인선원(能仁禪院)과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이 있다. 수덕사와 창건연대가 같은 정혜사는 구한말에 만공 스님이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곳으로 청방, 정강, 용성 등의 대스님이 거쳐 갔던 명소다.
정혜사는 1932년 만공 스님이 세웠는데, 수덕사로부터 모두 1,200계단을 오른 지점이며, 덕숭산 정상 부근 해발 450 지점에 위치한 정혜사까지는 수덕사 큰절에서 걸어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정혜사 앞 뜰, 모든 잎은 떨군 채 서 있는 감나무 옆에 '불유각'이라는 샘터가 있다. '佛乳'라 부처님 젖이라는 뜻인데 곰곰 생각하니 수도가 부족하면 먹으라고 붙여 준 이름인 것 같았다. 흔히들 힘이 부족하면 '엄마 젖 더 먹고 와'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오래 전 덕숭산을 다녀간 뒤 이런 시를 썼다.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했다는 만공과 정혜사의 약수를 마실 수 있는 불유각(佛乳閣)이 시적 감흥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소나무 떡갈나무 우거진
아늑한 그늘 사이로
한여름 더위가 선잠에 들었다.
가파른 돌계단을 기어오르면
여인네의 둔부 같은 암반 위
앙증스럽게 걸터앉은
너댓간 크기의 암자 하나
허허, 여기가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했다는
소문난 자네 처소인가
산마루에 스치는 상큼한 바람
속진(俗塵)을 털어내고
정혜사 뜰에 서서 마시는 약수는
불유(佛乳)라 했지!
너털웃음 쓸며
산 아래 굽어보니
멋에 취한 자네 모습
절로 보이네.
- 졸고 “덕숭산을 오르며- 만공 스님에게”
만공 스님은 1905년 수덕사 뒤 덕숭산 중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찾아오는 스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그 위에 정혜사를 만들었다. 그는 매일같이 그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도를 깨우쳤거늘, 어쩌다 이 계단을 오르며 헐떡거리는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굳게 닫힌 선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벼랑 아래로 홍성, 예산, 서산 등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공 스님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좋아했고 경치가 뛰어난 곳을 골라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정혜사 뿐 아니라 금선대, 전월사(轉月舍), 소림초당, 향운각 등 그가 세운 암자들을 보면 안목을 알 수 있다.
음력 보름이 되면 만공 스님은 정혜사 앞뜰에 나와 설법을 했고 정혜사 뿐 아니라 인근 견성암에서도 제자들이 몰려와 밝은 달 아래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경허·만공·혜월 선사의 영정을 모신 금선대는 정혜사 아래 왼쪽에 있다.
정혜사에서 내포지역을 조망한 뒤 정상(495m)까지는 약 15~20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밭둑을 지나 가파른 길로 올라가는데 집중호우 때 흘러내린 물이 등산로를 할퀴고 지나가서 곳곳에 바위들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다.
정상에는 덕숭산 표지석이 있다. 정상에 서면 충청도 내포지역이 시원스레 열리고, 가야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덕숭산까지는 왕복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수덕사와 덕숭산을 찾은 김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곳에서 30분 거리에 무학대사가 수학했다는 작은 섬 간월도와 간월암이나, 김좌진장군, 만해 한용운의 생가와 윤봉길의사 생가인 광현당, 윤의사가 성장한 저한당 등을 둘러볼 수도 있다. 배낭 하나 메고 가볍게 떠나 온천을 겸하여 이들을 모두 둘러본다면 큰 소득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