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원도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충남 공주 원도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공주, 너도 그렇다
공주=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풀꽃시인’ 나태주가 자전거를 끌고 공주 봉황산 자락 풀꽃문학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인은 서천이 고향이지만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공주에 정착했다. 공주=최흥수 기자
“애들이 그림을 막 개떡같이 그리는 거야. 어떻게 해야 찰떡같이 만들겠어?” 그래서 탄생한 시가 ‘풀꽃’이다. 2000년 무렵 나태주 시인이 초등학교 교장이었을 때 아이들에 들려준 조언이 단 세 문장으로 다듬어졌고, 그것이 국민 애송시가 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여행 철학
지난 17일 공주 원도심 봉황산 자락에 위치한 풀꽃문학관에서 나태주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지만 공주사범학교(현 공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줄곧 공주에 살고 있다. 문학관에 간다고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연이 있거나 약속이 잡힐 때만 나오기 때문이다. 불쑥 찾아갔다 우연히 만났으니 운이 좋았다.
문학관으로 들어서는 언덕 담벼락에 ‘풀꽃’ 외에 ‘행복’ ‘선물’ 등 그의 대표작이 시화전처럼 장식돼 있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그의 작품 ‘행복'이다.
시가 쓰인 담장을 배경으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시인의 표정이 꽃처럼 화사하다. 공주에서 움직일 때는 늘 자전거로 이동한다고 한다. 자택에서 문학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봉황산 기슭의 풀꽃문학관. 1930년대에 지은 일본식 가옥을 개조했다.
▲“요새는 휴대폰이 없으면 시를 못 써.” 사진을 찍는 중에도 휴대폰에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다. 일상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하는 게 습관이다.
▲문학관 옆에 방문객을 위해 ‘풀꽃’ 시비를 세워 놓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요청에 흔쾌히 문학관 옆 시비 옆에 선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니 아예 커다란 바위에 ‘풀꽃’을 새겨 포토존으로 만들었다. 셔터를 누르는데 시인의 시선이 카메라가 아니라 자꾸만 휴대폰에 가 있다. 문자를 보내는 건지 열심히 적는다. 느릿한 일상을 찬미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좀 난감하다. “아, 방금 시가 하나 나왔어! 자전거가 시를 쓰게 한다, 바퀴도 굴러가고 인생도 굴러간다.”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간결하지만 깊다. “일상을 떠나면 시가 아니야. 그런 시는 바위 속에나 있지, 어디에 갖다 써?” 그제야 휴대폰이 없으면 시를 못 쓴다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된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에 바로 메모하는 게 습관이었다.
풀꽃문학관은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개조해 2014년 개관했다. 시인이 지역의 문인, 문학지망생, 관람객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강의를 하는 공간이다. 문학관에 갈 땐 그의 시집 한 권쯤 가져가면 좋다. 운이 좋아 시인을 만나면 시를 곁들인 멋진 자필 사인을 받을 수 있다. 혹시 책을 구하지 못했다면 문학관에서 살 수 있다. 찾는 사람이 많아 시인이 자비로 구입해 놓은 책을 판매하고 있다.
▲풀꽃문학관 내부에 전시된 나태주의 작품집. 찾는 사람들이 많아 자비로 구입한 책을 팔기도 한다.
▲나태주의 책을 사가면 시 한 수를 곁들인 멋들어진 사인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운이 좋아 그를 만났을 때만 가능하다.
공주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중이라 했더니 여행에 대한 철학을 술술 풀어낸다. “연애시가 언제 필요할까? 연애가 끝났을 때지. 사랑하는 마음이 빠져나간 곳, 그 공허함과 결핍을 채워 넣는 거지.
여행도 마찬가지야. 요즘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풍요 때문이야. 물질적인 것으로 꽉 차니까 정신적인 것이 못 따라가. 밖은 화려한데 안은 누추하고 삭막해. 그 내면과 외면의 불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게 여행이야. 한 템포 쉬고, 주변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여행은 훔쳐보는 행위이고, 여행지는 숨어서 들키기를 기대하는 곳이야.” 작은 것을 유심히 보는 데에는 연습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공주 원도심을 여행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공주 원도심
풀꽃문학관 바로 앞은 공주사대 부설 중고등학교다. 조선 후기 충청감영이 있었던 자리다.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은 1602년(선조 53) 공주로 옮아왔다. 공산성과 제민천변으로 몇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 1707년 이 위치에 자리 잡았고,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옮아갈 때까지 200년 넘게 충청도의 행정 중심이었다. 1859년 49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감영의 대문 격인 ‘포정사(布政司)’ 문루만 복원해 놓았다. 문루는 사대부고의 교문을 겸하고 있다. 지역 명문을 자부하는 이 학교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근사한 교문을 얻은 셈이다.
▲충청감영의 정문 격인 포정사 문루.
▲복원한 포정사 문루는 공주 사대부고 교문이기도 하다.
이곳을 비롯해 제민천 주변 일대가 공주의 원도심이다. 공주는 금강을 중심으로 남측이 옛 시가지, 북측이 새 시가지다. 제민천은 공주 옛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해 금강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개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아담한 규모다. 물길 양쪽으로 산책로가 나 있어서 주민들이 운동 코스로 이용한다.
하천 주변의 오래된 건물은 최근 도심정비사업으로 게스트하우스, 카페, 식당 등으로 변신했다. 옛 직물공장 건물에 둥지를 튼 ‘고가네칼국수’와 ‘맛깔’은 지역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자리 잡았다. 대통교와 반죽교 사이에 잠자리 날개 조형물을 붙여 놓은 골목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 스러져 가는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난다. 폐허인가 싶은데, 대문에 ‘루치아의뜰’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허술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한옥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정갈한 카페다.
▲공주 원도심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제민천.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낚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 세워져 있다.
▲제민천변 옛 직조공장을 개조한 ‘맛깔’ 식당.
▲하숙집 콘셉트의 게스트하우스로 단장한 제민천변 주택.
▲제민천변 골목길 안의 한옥카페 ‘루치아의뜰’. 겉모습은 이래도 내부는 한옥의 골격을 그대로 살린 정갈한 카페다.
대통교에서 시청 앞 로터리에 이르는 구간엔 40~50년 전 모습 그대로 단층 주택이 밀집해 있다. 여느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세월의 더께가 한 층씩 쌓여 가는 마을인데, 골목마다 깨알 같은 보물이 숨어 있다. ‘골목길’ ‘일상의 발견’ ‘자전거’ ‘목소리’ 등 나태주의 시 작품이 담장 곳곳에 붙었다. 나 보란 듯 거창하지 않다.
이렇게 말을 하고 저렇게 말을 바꾸어 보아도 인생은 쓸쓸한 것이다.
서글픈 것이고 외로운 것이고 적막한 것이다.
언제든 쓸쓸하지 않으려고 서글프지 않으려고 할 때 산통이 깨졌다.
일이 터졌다.
이눔아 나도 이렇게 쓸쓸하고 서글프고 외롭고 적막한데
네 놈이라고 별 수 있겄냐!
하늘 위에서 누군가 대갈일성 호령으로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
후두둑 빗방울 던지신다.
이마 위에 찌익 날아가던 새가 물똥 갈기신다.
그의 '골목길'이라는 시다. 이 시는 영락없는 시골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너무 호젓하여 쓸쓸하고 외로운 골목길에 느닷없이 비가 오고 날아가던 새가 물똥을 갈긴다.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런 골목길 보도블록 틈을 헤집고 간신히 잎을 내민 풀꽃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어느 담장에는 바리캉으로 머리를 깎는 동네 아이 인형이 올려져 있고, 야구공을 던지는 박찬호의 모습도 숨어 있다. 담벼락에 희미하게 쓰인 1955ㆍ1979ㆍ1985 등의 숫자는 그 집을 지은 연도다.
▲공주 원도심의 제일감리교회. 1932년 지은 건물이다.
▲1937년 지은 중동성당 역시 고풍스럽다.
▲공주 원도심의 반죽동 당간지주. 웅진백제시대 창건한 대통사가 있던 자리다.
이 구역에서 그나마 번듯한 건물은 공주제일감리교회다. 1932년 지은 고딕양식 붉은 벽돌 건물로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1902년 초가로 시작한 이 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의 감리교회라는 자부심이 높다. 제민천 건너편 언덕의 중동성당 본당과 사제관 역시 1937년에 완공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성당 건물 특유의 기품이 있고, 언덕에 자리 잡아 공주의 옛 도심이 아늑하게 내려다보인다.
감리교회 바로 앞 주택가에는 절간이 없는 ‘반죽동 당간지주’가 서 있다. 지주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제 성왕 5년(527)에 창건한 대통사가 있던 자리였다니 교회와 성당의 역사가 무색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공주의 백제 유적
공산성은 예나 지금이나 공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금강 남쪽 낮은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이다. 공산성의 역사는 웅진백제(475~538) 때 흙으로 쌓은 토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그 후부터 공산성으로 불렸다. 지금의 석성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선조ㆍ인조 때다.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뒤에는 쌍수산성으로도 불렸다. 인조가 두 그루 나무(雙樹) 아래 쉬며 난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성곽 서편에서 올려다본 공산성 금서루 일대 풍경. 성곽길을 따라 한 바퀴 산책할 수 있다.
▲성곽길 서북쪽 언덕에 오르면 공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금강 물줄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공산성에서 내려다보는 금강과 금강교.
산성 꼭대기의 쌍수정 안내판에는 이 내용과 함께 인절미의 유래도 적어 놓았다. 인조가 6일간 머무는 동안 임씨 성을 가진 주민이 떡을 해서 바쳤다. 인조가 ‘절미(絶味)’라 칭찬했지만 떡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어 임씨가 만든 절미라는 의미로 ‘임절미’라 불렀고, 나중에 인절미가 됐다는 얘기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너무 진지하게 써 놓았다.
관람객은 공산성 약 2.6km 성곽을 산책로처럼 걸을 수 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계곡은 어디서 보나 포근하다. 금서루에서 서편 끝자락 누대에 오르면 바로 아래에 트러스 구조의 금강교가 멋들어지게 내려다보이고, 공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금강 물결이 잔잔하게 흐른다. 해 질 무렵 강 북쪽 금강공원에서 보면 일몰 풍경이 아름답고, 해가 지면 경관 조명이 운치를 더한다. 오르락내리락 자연 능선을 고스란히 살린 공산성의 윤곽도 한층 또렷해진다.
▲공산성 정상 부근에서는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공산성 전체 둘레는 약 2.6km.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 가량 걸린다.
▲밤이 되면 공산성 성곽길 전체에 경관조명이 켜진다. 강 북측에서 바라보면 능선을 따라 연결된 성곽길 윤곽이 잔잔한 금강 물에 비친 모습을 볼 수 있다.
▲금강 북측에서 본 공산성 야경.
백제 문화의 진수는 공산성 서쪽, 송산리고분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7기의 무덤 중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은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즉,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 미의식의 정수로 평가된다.
실제 무덤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고분군 전시관에 실물 크기의 무덤을 재현해 놓았다. 역사교과서를 통해 여러 번 접해 익숙하지만, 그 감동은 실제 들어가야만 알 수 있다. 세밀한 문양을 새긴 점토판으로 마감한 벽면, 조명과 환기창까지 보고 있으면 고대 역사의 한 장면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넓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화려하기까지 한 무덤이라니….
▲송산리 백제 고분군. 무령왕릉을 비롯해 7기의 무덤이 있다.
▲송산리고분군 전시관에 무령왕릉 무덤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무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느낌은 그 안에 들어갔을 때만 실감할 수 있다.
▲무령왕릉 무덤 벽면의 불꽃 등잔과 정교한 문양.
박물관에 흥미가 없더라도 인근의 국립공주박물관은 꼭 가길 권한다. 사진과 자료로만 접했을 때와 실제로 마주한 백제의 예술은 차이가 크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鎭墓獸), 글자를 새긴 용 무늬 팔찌, 왕의 허리띠에 표현된 하트 문양, 금제관식을 장식한 도깨비 등은 보면 볼수록 신비하고 사랑스럽다. 무령왕 금제관식 앞에서는 누구나 한동안 발걸음을 멈춘다. 물욕이 아니라 풀잎처럼 하늘거리는 ‘금 잎’의 유혹 때문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상상의 동물 진묘수 진품.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의 금제관식.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 왕비 금제관식의 일부. 웃고 있는 도깨비 문양이 보인다.
▲무령왕 허리띠의 하트 문양.
▲고마나루의 솔밭 산책로.
박물관 인근 금강변은 고마나루(곰나루)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곰 사당을 지나면 무성한 솔밭길이 이어진다. 나루는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옛 정취를 떠올리며 산책하기 그만이다.
<출처> 2020. 1. 29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