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 산빛 닮은 물빛, 대청호에서 시(詩)를 만나다.
충북 옥천
산빛 닮은 물빛, 대청호에서 시(詩)를 만나다.
문화일보 박경일 기자
▲충북 옥천 대청호 수변의 정자 청풍정. 새잎이 돋는 이즈음의 풍경이 한 해 중 가장 아름답다. 이곳에는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뒤 숨어들었던 구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얘기가 깃들어 있다. 자신과 사랑에 빠져 김옥균이 큰 뜻을 접었다고 생각한 명월은, 그를 놓아주겠다며 정자 뒤쪽의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연둣빛 신록의 화려함으로 겨룬다면 충북 옥천의 봄 풍경을 따라올 곳이 있을까요. 대청호와 금강 을 끼고 있는 옥천은 신록이 유독 아름답습니다. 옥천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입니다만, 잦은 봄비로 호수는 만수위를 기록했고 강물도 제법 몸집을 불렸으니 지금 옥천의 봄 풍경은 예년보다 빼어납니다. 옥천의 봄날에 마주쳤던 물과 숲이 만든 풍경 이야기를 여기 풀어놓습니다.
# 꼭꼭 숨어 있던 옥천의 명소 두 곳
충북 옥천 땅에서 꼭꼭 숨어 있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곳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나는 물 위의 풍경,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산속의 숲 얘기다.
먼저 물 얘기부터. 잦은 봄비로 지금 대청호는 만수위다. 대청호로 흘러드는 금강 상류의 물줄기도 하나같이 몸집이 불었다. 신록이 물든 봄날에 대청호와 금강에 물이 차오르면 옥천 땅 곳곳에는 그림 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물을 한껏 빨아들인 수변 나무의 맑은 초록이 고요한 수면 위에 선명한 도장처럼 찍힌다.
옥천 땅에 물과 어우러지는 최고의 경치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대청호 상류 쪽의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에 병풍처럼 떠 있는 ‘부소담악(芙沼潭岳)’이다. 부소무니란 마을 이름은 고리산 자락 아래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리고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가에 떠 있는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부소담악은 본래 산줄기였던 곳이 대청호 담수로 물에 잠기면서 칼날 같은 능선만 수면 위에 길게 드러났고, 물에 잠긴 부분의 흙이 씻겨나가면서 바위가 드러나 마치 바위 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독창적인 풍경이 된 곳이다. 물 위에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 바위의 길이가 자그마치 700m나 된다.
부소담악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절경임에도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다. 빼어난 명승에는 옛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법인데, 부소담악에는 경관의 값어치에 걸맞은 얘기가 없다. 그저 유배객 송시열이 일대의 풍경을 통틀어 ‘소금강’이라고 일컬었다는 것 정도가 전해지는 이야기의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소담악의 비경은 대청댐 담수로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경관이기 때문이다. 산자락이 물에 잠기고, 긴 능선이 돌 병풍처럼 남아 만들어진 부소담악 경관의 탄생시점을. 대청호가 완공된 해로 잡으면 ‘1981년 산(産)’인 셈이다.
▲물 건너 맞은편의 구릉 위 조망지점에서 바라본 옥천의 ‘부소담악(芙沼潭岳)’과 정자 추소정의 모습. 30년째 농사를 짓던 이가 땅을 사들여 간벌하면서 이런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부소담악은 대청호 물에 잠긴 산줄기의 바위가 돌 병풍처럼 길게 이어진 절경에 붙여진 이름이다.
# 밖에서 안을 보는 자리…부소담악
경관 명소는 두 종류로 나뉜다. 그곳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는 조망대 역할을 하는 곳도 있고, 명소가 경관의 일부가 돼서 밖에서 그곳을 보는 경관이 빼어난 곳도 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관이 그림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맛이 훌륭한 곳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기준으로 나눈다면 부소담악은 ‘밖에서 안을 보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부소담악의 정자 추소정도 그 안에 들지 않고, 뒤로 물러 바위와 어우러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최고다.
그런데 문제는 부소담악 정면을 마주할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소담악 앞으로는 물줄기가 U자 형상으로 굽이친다. 부소담악 물 건너편은 깊은 숲과 거친 벼랑 때문에 섬이 아닌데도 배가 아니면 닿지 못한다.
어찌어찌 물 건너 땅으로 배를 타고 건너간다 해도 부소담악의 전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야가 나올 법한 구릉이 있긴 하지만 굵은 나무들이 가로막아 경관을 즐길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소담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부소담악을 바라볼 수 있는 근사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30년 전쯤 부소담악 맞은편에 땅 120평을 사들여 농사를 짓던 이재홍(59) 씨. 해마다 조금씩 사들인 일대 땅이 1만여 평에 달하자 지난 해부터 땅을 다듬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소담악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냈다.
여기서 정면으로 보는 부소담악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마침 대청호 수위상승으로 바위 병풍의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경관은 더욱 그림 같았다. 이런 빼어난 경관을 혼자 보는 게 너무 아쉽다는 그는 부소담악을 찾아온 이들에게 자신의 땅을 열어줄 방법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 어쩌다 사서, 어쩌다 기른 숲
이번엔 산속의 숨겨진 숲 얘기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에 꼭꼭 숨겨진 산림욕장이 하나 있다. 화인산림욕장. 지난 2013년 일반에 개방한 개인 소유의 숲이라는데, 입장료도 없고, 이렇다 할 시설도 없다.
먼저 전제할 것. 여기는 다른 독림가들이 키운 숲처럼 ‘생애를 바쳐’ 비장하게 키워낸 숲이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갖게 된 고향 땅의 산에, 또 어쩌다 보니 나무를 심게 됐고 그렇게 45년의 시간이 더해져서 만든 숲이다. 그렇다고 ‘심고 가꾸기’를 대충대충 했다는 뜻은 아니다. 산을 사고 거기 나무를 심은 것은 어쩌다 벌어진 일이었으되 숲에 들인 정성만큼은 누구와 비교해도 지지 않는다니 말이다.
화인산림욕장까지는 비좁은 논둑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 도무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 안내 팻말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러다 길이 끊겨 낭패를 당하지나 않을까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분명 ‘최근에 넓힌 길’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전에 이 길은 과연 어땠을까.
화인산림욕장을 찾은 날,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짐작건대 탐방객이 찾아오는 날보다 사람이 없는 날이 더 많지 싶었다. 외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옥천 주민들도 여기를 아는 이가 적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애초부터 산림욕장에 기대는 없었다. 궁금했던 건 이것이었다. 입장료도 없고, 하다못해 커피 한잔 팔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찾아오면 번잡스럽기만 할 뿐 득이 되는 일은 하나 없을 게 뻔한데 대체 누가, 왜 이렇게 소득 한 푼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화인산림욕장 주인 정홍용(74) 씨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인공 고관절 치환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절룩거리며 혼잣말처럼 “나무를 심느라 다리가 다 망가졌다”고 중얼거렸다. 산림욕장 구석구석을 3시간이 넘도록 샅샅이 둘러보고 난 뒤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서 이 깊고 넓은 숲의 나무를 죄다 혼자 심었으니 몸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깊은 산중에 산림욕을 즐길 수 있을만한 거대한 숲을 만들어 내느라 한 사람이 감당한 ‘노동의 총량’은, 그것이 비록 45년에 걸친 것이었다 해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북 옥천의 화인산림욕장. 45년을 가꾼 개인 소유의 숲인 이곳에는 자그마치 1만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해 있다.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숲은 늘 호젓하다.
# 척박한 오지의 산이 수목원이 된 까닭 ▲ 충북 옥천의 이지당.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돼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조헌이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산림욕장에 당도하자 몸이 저절로 숲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산림욕장 들머리에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마치 마중이라도 나와 있는 듯했다. 우람한 둥치의 실핏줄 같은 가지마다 돋아난 여린 새잎의 색감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옥천 부소담악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경유해 옥천나들목으로 나오면 바로 옥천읍이다.
정 씨의 고향은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 1구. 화학리 1구는 학촌마을과 엽송마을, 그리고 만곡마을 등 3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다. 산림욕장이 들어선 산은 본래 세 마을 주민들의 공동소유였다.
주민들이 산을 팔기로 한 건 전기 때문이었다. 때는 1975년.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려면 주민들이 자그마치 25년에 걸쳐 비용을 분할 상환해야 했다. 그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주민들은 공동묘지로 쓰는 마을 공동소유의 산을 팔아 비용을 충당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쓸모없는 오지의 척박한 산을 사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다급해진 주민들은 땅을 사줄 만한, 도회지에 나가 성공한 고향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성공해 종로통에 대형 약국을 차린 고향 사람도, 마을 출신 국회의원도 다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이 땅을 정 씨가 샀다. 부친이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던 인연으로, 대학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원을 다녔던 그는 일본에서 일하면서 번 돈 250만 원을 다 털어 마을 산 6만여 평을 샀다. 지금의 가치로 셈하면 3억 원쯤 되는 돈이다.
그가 고향 마을의 쓸모없는 산을 산 건 전후 일본의 조림사업을 가까이서 본 게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나무를 심고 키워서 수입을 올리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 ‘갖고 있으면 괜찮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이었다.
처음 그의 나무 심기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시작됐다. 사정인즉 이렇다. 부지런한 농사꾼은 스스로도 부지런하지만, 남의 게으른 꼴도 못 봐준다. 완고한 어르신일수록 더 그렇다. 피가 무성한 논 주인이며, 잡초가 자란 밭 주인이 이웃으로부터 게으르다며 타박을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정 씨도 마찬가지였다. 산을 사서 그냥 놔두자 대번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돈푼깨나 있다고 산을 사놓고는 그 넓은 땅을 다 놀린다’는 게 욕을 먹는 이유였다.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주말마다 내려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가볍게 운동처럼 시작한 일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내 숙명이 됐고, 그 일은 자그마치 4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 청량한 숲길을 조용히 걷다
정 씨는 산 전역에다 3만5000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심었다는데, 그중에서 절반 넘게 죽고 1만 그루가 살아남아 이렇게 우람하게 자랐다. 이 정도만으로도 다른 숲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국내 최대의 메타세쿼이아 군락지다. 산림욕장 들머리 오솔길에 사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이 이렇게 살아남은 것들이다.
산허리를 감으면서 이어지는 산림욕장의 전체 산책코스는 4㎞ 남짓. 수직의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자 밤나무와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숲을 지나 붉은 둥치의 금강송 숲이 등장했다.
산허리를 감고 이어지는 숲길 내내 피톤치드의 향기가 출렁거렸다. 산림욕장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조용하고, 고즈넉하다는 것. 눈을 확 휘어잡는 경관은 없지만,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제 발걸음소리만 데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번졌다.
정 씨는 아직 산림욕장 입장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 시설을 더 갖춘다면 모를까. 이 정도만 해놓고 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산림욕장 개방은 지난 2013년 우연찮게 숲을 찾은 안남면장이 “이 좋은 숲을 혼자만 누리는 건 벌 받을 일”이라며 사정 반, 위협 반으로 조르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산림훼손과 쓰레기 투기 등을 걱정했지만 정 씨는 “막상 개방해 보니 숲을 찾아오는 이들의 매너가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고 했다. 개방 이전과 이후가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정 씨는 “이 숲을 제 것처럼 아껴주는 관람객들을 위해, 앞으로 힘 닫는 데까지 나무를 심고 가꾸겠다”고 했다. 나무를 심고 가꾼 이의 이런 소박한 진심이 화인산림욕장의 숲에는 담겨 있다.
# 적막하고 나른한 봄날의 옥천
옥천 곳곳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도처에 있다. 신록이 물드는 요즘 같은 봄날, 더구나 잦은 비로 대청호며 금강 줄기가 만수위로 출렁거린다면 호반이나 강변 어디서든 한 편의 시와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신록이 가장 화려한 곳이라면 단연 금강 지류인 소옥천 일대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이 낙향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당 이지당과 소옥천 생태공원 사이 구간에서 만나는 신록은 탄성부터 나온다. 물가의 버드나무 신록의 색감이 어찌나 강렬한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하다.
금강이 호수에 담기는 대청호 상류의 군북면 석호리의 정자 청풍정 일대 경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청풍정에는 구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쫓기는 몸이 된 김옥균이 명월과 함께 이곳으로 숨어들었단다. 뜻이 꺾인 김옥균이 이곳에서 무력한 생활을 하며 두문불출하자, 명월은 김옥균이 자신과 사랑에 빠져 이곳을 떠나 꿈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다.
여기까지 보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훗날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인근에서 계집종으로 신분이 격하돼 10년 동안 치욕과 고통 속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면 생각은 좀 달라진다.
옥천에서 가장 빼어난 강변길은 금강 유원지에서 둔주봉이 있는 안남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금강 유원지를 출발해 합금리를 지나 가덕마을까지 이어지는 길도 나무랄 데 없지만, 특히 청마 대교부터 종미리까지 강을 끼고 이어지는 길이야말로 차로 달리는 게 아쉬울 만큼 뛰어난 경관을 품고 있다.
나들이객들은 다들 이름난 관광지로 몰려갔으니 이 길은 호젓하기 짝이 없다. 어디 강변길뿐일까. 봄날 옥천은 어디나 한가하다. 옥천읍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도,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600년 역사의 옥천향교도 모두 봄 햇살 아래 적막하고 나른하다.
■ 여행정보
부소담악을 가려면 옥천읍에서 4번 국도에 올라 대전 방면으로 향하다 환경사업소에서 우회전해 이지당을 거쳐 15번 군도를 따라가면 된다. 고리산(환산·581m) 둘레를 도는 이 길은 대청호 상류의 물길을 바라보며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금강유원지에서 안남면까지 금강변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코스를 즐기려면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안쪽에 있는 금강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여기서 575번 지방도로를 타면 강변을 끼고 합금리를 지나 독락정까지 이어진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가족 단위 여행이라면 옥천의 장령산휴양림(043-730-3491)이 적당하겠다. 평일 기준 4만5000원부터. 휴양림이라 주변 환경은 괜찮지만 운영이 이른바 ‘공무원 식’이다. 오후 6시를 넘기면 ‘정산을 마쳤다’는 이유로 객실이 비어도 더 이상 숙박손님을 안 받는다. 한 마디로 ‘귀찮다’는 뜻일까. 결혼식장과 양식 레스토랑 등을 부대시설로 운영하고 있는 명가모텔(043-733-7744)도 괜찮다. 가장 최근에 지은 타워팰리스모텔(043-731-0814)도 깔끔한 편이다. 옥천의 터줏대감 맛집으로는 문 연 지 60년을 넘긴 구읍할매묵집(043-732-1853)이 첫손으로 꼽힌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열었다. 지난 2009년 주인 할머니가 세상을 뜬 뒤 막내아들 내외가 식당을 이어받았다.
금강을 끼고 있는 옥천을 대표하는 음식은 단연 생선 국수다. 옥천읍의 대박집(043-733-5788)이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이름난 맛집이다. 청산면의 선광집(043-732-8404)도 50년 내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옥천에서는 올갱이(다슬기)국밥도 빼놓을 수 없다. 미락올갱이(043-733-4845)와 금강올갱이(043-731-1988)가 양대 맛집으로 꼽힌다.
<출처> 2018. 4. 25 / 문화일보